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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344
한자 推心
영어음역 Chusim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류영철

[정의]

통일신라시대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서 중사(中祀)를 지내던 곳.

[개설]

신라의 국가 제사는 크게 국가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왕자(王者)의 권위의 형성과 유지에 관계있는 국가와 왕실의 조상 제사, 국가의 안녕과 절대적인 풍요를 기원하는 농경 제사, 왕경과 전국을 차등 있게 편제한 산천 신에 대한 제사, 왕경민의 생활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기복적이며 민속적인 제사 등 복잡한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국가 제사 체계는 당(唐)의 그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신라적인 특징을 지니는 것이기도 하였다.

특히 신라는 전국적인 산천 제사를 삼산(三山)과 오악(五岳) 및 명산대천으로 나누어 대사(大祀)·중사·소사(小祀)로 구분하여 체계화하였다. 그중 대사는 삼산, 중사는 오악·사진(四鎭)·사해(四海)·사독(四瀆), 소사는 설악(雪岳) 이하 서술(西述)까지의 산천이 속하였다. 산천 제사 중 대가야군에 설치된 추심(推心)과 관련하여 사전(祀典)에는 중사의 오악·사진·사해·사독 다음에 별도의 표제명이 없이 속리악(俗離岳)·추심·청해진(淸海鎭) 등 6곳의 제장(祭場)이 수록되어 있다. 즉 추심은 신라의 산천 제사 체계 속에 중사로 편제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소사에 실릴 것이 잘못해서 중사에 실렸다는 견해도 있으나, 사전이 성립된 뒤에 추가 편입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제정경위 및 목적]

신라의 산천 제사는 대·중·소로 나누어 신라의 명산대천에 국가적으로 지내던 제사로 675년(문무왕 15)에서 735년(성덕왕 34) 사이에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에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대가야군에 설치된 추심 역시 신라의 삼국 통일 직후에 제정되었다고 여겨진다. 신라가 전국의 명산대천에 대한 제사를 대·중·소로 나누어 차등 있게 편제한 것은 지방 세력이나 지역 집단을 신라의 지배 체계로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신라 입장에서 대가야 지역이 차지하는 위상이나 상징성 등을 고려해 본다면 통일 직후 옛 대가야의 유민들을 포섭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심을 중사에 배정하여 산천 제사 체계 속에 편입시켰다고 볼 수 있다.

[관련기록]

추심과 관련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잡지」 제사지에 “중사……오악……사해……사독……속리악[삼년산군(三年山郡)]·추심[대가야군(大加耶郡)]……청해진[조음도(助音島)]”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추심이 신라의 산천 제사 가운데 중사에 속하며 대가야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추심의 위치와 관련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합천군 사묘조에는 “정견천왕사(正見天王祠)는 해인사(海印寺) 안에 있다. 속설에는 대가야의 왕후 정견이 죽어서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미숭신사(美崇神祠)는 미숭산 꼭대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추심의 제장은 이 두 곳 중의 한 곳으로 추정된다.

[변천]

추심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제장이 대가야군에 있다고만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설치 시기와 위치는 알 수 없다. 대가야군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하는 562년(진흥왕 23)에서 757년(경덕왕 16)에 이르기까지 고령 지역에 설치되었던 행정구역이므로 추심은 그 사이에 설치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국가 제사 체계가 675년경에 성립된 것으로 파악되므로 추심도 이때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명산대천에 대한 제사는 해당 지역의 지방 세력이나 지역 집단을 포섭하기 위한 의도가 깔린 것이었다. 산천 제사는 전통이 매우 깊었고 지역민을 하나로 묶는 구실을 했으므로 신라가 대가야군추심을 중사의 하나로 포함시킨 것은 추심 지역에서 행해진 대가야 유민들의 전통적인 제사를 국가적 제사 체계로 포섭하여 지역민들을 회유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추심의 구체적인 위치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가야산미숭산 두 곳 가운데 한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가야는 자체적인 건국 신화를 가지고 있는데, 특히 가야산신인 정견모주(正見母主)를 매우 중시하였다. 정견모주대가야 시조의 어머니로 묘사되고 있으며, 대가야월광태자(月光太子)정견모주의 10대손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대가야시대는 물론 대가야 멸망 이후에도 고령 지역에서는 정견모주에 대한 제사가 오랫동안 전승되었으며, 그것을 매개로 주변 지역민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대의 자료이지만, 가야산 해인사에는 정견모주를 모신 정견천왕사(正見天王祠)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불교 사원은 고대의 토착[무격] 신앙의 성소에 건립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해인사는 정견모주를 제사지내던 곳에 건립된 사찰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가야산과 함께 추심의 제장으로 거론되는 곳이 미숭산이다. 경상남도 합천군과 경상북도 고령군 경계 지점에 있는 산으로 산꼭대기에는 미숭신사가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이미숭(李美崇) 장군과 관련한 사당이 있었다고 전해 온다. 고령군에서는 1970년대까지 미숭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현황]

해인사의 일주문을 거쳐 봉황문을 지나 해탈문으로 오르는 계단 아래 오른쪽 귀퉁이에 국사단이 자리 잡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집 사당으로 과거 정견천왕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점에서 국사단은 대가야 건국과 관련된 성지였던 셈이다. 현재 미숭산 정상에는 대가야시대의 미숭산성이 남아 있으며 산성 일부는 최근에 복원하였다. 미숭신사 터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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