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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353
한자 朝鮮時代
영어의미역 Joseon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일수

[정의]

1392년부터 1910년까지 고령 지역의 역사.

[개설]

조선시대는 1392년 조선 건국에서 1910년 한일합방까지 경상북도 고령 지역의 역사를 말한다. 여기에서는 조선시대 지방 제도와 고령, 고령의 향촌 자치, 고령의 경제와 산업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 지방 제도와 고령]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던 조선의 지방 행정 제도는 1413년(태종 13)에 이르러 전국을 8도로 나누는 등 전면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각 도에 종2품의 감사를 두어 도정(道政)을 총괄하게 하였다. 각 도의 감사 아래에는 해당 도의 읍을 통치하는 수령이 파견되었다. 이때 고령은 현으로 편성되어 고려 이래 파견되던 감무 대신에 종6품의 현감이 파견되었다. 아울러 지방 교학의 진흥을 위해 세종 때부터는 훈도(訓導) 1명이 파견되었다.

고령현감 아래에는 좌수, 별감, 군관, 인리(人吏), 지인(知印) 등 향직(鄕職)과 이직(吏職) 및 군직이 배치되어 수령의 행정을 보좌하였다. 이후 1614년(광해군 7) 8월에 성주의 이창록(李昌祿)[? ~1615]이 왕을 비방한 사건을 일으켜 성주목이 혁파되어 잠시 고령현에 합속된 적이 있었다. 그 뒤 1895년 갑오개혁 시기 지방 제도의 개편에 따라 고령군으로 개칭되고, 현감 대신에 군수가 파견되었다.

15세기 이후 이(里)·동을 관할하는 상급 행정 구역으로 면이 정착함에 따라 임진왜란 이후에는 군현을 면·리로 세분하는 면리제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영남여지(嶺南輿誌)』에 의하면, 조선 후기 고령에도 면리제에 따라 14개 면에 65리가 두어졌다.

조선 군제 편제에서 고령은 성주와 더불어 성주도의 중익(中翼)에 소속되었다. 이어 1457년(세조 3)에 진관 체제가 확립되면서 고령은 초계·합천·거창·지례와 함께 성주진에 편제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고령의 군액도 새롭게 중앙 군영으로 번상하거나 보포(保布)를 납부하는 병력이 추가로 편성되었다.

[고령의 향촌 자치]

조선의 지방 지배는 왕- 감사- 수령 등으로 체계화된 관치행정과 경재소- 유향소- 면리임(面里任) 등으로 이어지는 사족 중심의 향촌 자치적인 계통 및 행정 실무적인 향리 계열 등 삼자가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16세기 이후부터 사림 세력은 훈척 세력들의 향촌 지배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수단을 모색하였다. 이는 향촌에 성리학적 실천 윤리를 보급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학』 교육을 실시하고 더불어 향약을 실행하였다. 고령의 향약 주도 세력은 향약에 참가한 자들의 명부인 향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바, 고령향교에 소장된 17세기 초부터 후반까지의 『고령향안(高靈鄕案)』을 살펴보면 모두 22개의 성씨를 확인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빈도수가 높은 이·박·김·최·정·전·곽씨가 고령 지역의 향촌 자치를 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향약은 시행 주체·규모·지역 등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그중 동약(洞約)은 향약의 하부 조직으로서 촌락 단위에서 실시된 것이다. 특히 동약은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의 4개 덕목 중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환난상휼에 대한 비중이 높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고령에서 전해지는 대표적인 동약으로는 매촌동약(梅村洞約)이 있다.

한편, 고령 사람의 학문적 동향은 남명학의 토대를 구축하면서도 퇴계학파와의 접점을 모색하는 데 주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는 퇴계 이황(李滉)[1501~1570]과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의 문하에서 동시에 수학한 유학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고령의 경제와 산업]

경상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고령은 수류를 따라 농토가 형성되었으며, 둘러싸인 산세로 인해 비옥함과 척박함이 반반을 이루었다. 기온은 농작물 재배에 적당하여 일찍부터 벼와 보리 등의 작물이 많이 생산되었다.

조선 후기 선진화된 농업 기술이 재지사족의 향촌 개발 과정에서 보급됨에 따라 고령의 전결과 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고령의 전결 총수는 2,177결이며, 수전이 한전에 비해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제언 중심의 수리 시설은 16세기 이후 대소 하천의 중·상류 지역에 수로를 만들어 물을 끌어 오는 방법을 사용한 보(洑)가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고령은 고려시대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경상북도 지방을 대표하는 도자기 주산지였다. 전국적으로 사기장이 6명이나 있는 곳은 고령 외에 전라도의 순천과 부안 두 군데뿐이었다. 고령에는 운수·성산·쌍림·고령·우곡 등 5대 요지군이 있고, 여기에 3백여 개소의 가마터가 분포해 있었다. 특히, 고령에서는 자기소가 유명하였다.

조선시대 지방 경제는 장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 지방 장시의 발달에 따라 고령에도 읍내장안림장이 있었다. 19세기 말 지방의 장시는 더욱 확산되어 고령에서도 각 면에 장시가 들어섰다. 한편, 고령에는 부보상 조직인 고령상무사(高靈商務社)가 활동하였다. 고령상무사는 부상단인 좌사계가 1866년, 보상단인 우사계가 30여 년 뒤인 1899년 무렵부터 활동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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