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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364
한자 丁酉再亂
영어음역 Jeongyujaeran
영어의미역 Jeongyu War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호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쟁
발생(시작)연도/일시 1597년 7월 15일[도진리전투]
종결연도/일시 1597년 8월 16일[용담천전투]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상북도 고령군
관련인물/단체 정기룡

[정의]

1597년 정유재란 때 고령 지역에서 정기룡 부대가 왜군에 맞서 싸운 전투.

[개설]

1597년(선조 30) 왜군이 조선을 재침략한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8월 초순 왜군이 고령 방면으로 침입하자 정기룡(鄭起龍) 장군이 고령에서 왜군과 맞서 7월 15일 도진리전투, 8월 7~8일 둔덕대첩, 8월 16일 용담천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역사적 배경]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은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를 완전히 점령한 뒤에 북상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이 작전 계획에 따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군사 1만 명이 의령현과 삼가현을 거쳐 성주 방면으로 북상함과 동시에 배를 통해 낙동강을 올라오기도 하면서 1597년 8월 초순에 고령 방면에도 나타나 왜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발단]

왜군이 고령으로 진출하자 금오산성을 지키고 있던 정기룡 장군은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명을 받아 기병 150명과 보병 800명을 거느리고 고령에 와서 왜적과 전투를 벌였다.

[경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선봉장으로 한 다이라 스키마스[平調益]가 이끄는 왜군 1,000명이 1597년 8월 초순, 고령 서남방 둔덕(屯德)[현 고령군 대가야읍 중화리]에 주둔하여 가교를 설치하고 요새지를 구축하는 등 왜군의 북상을 용이하게 하는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고령에 도착한 정기룡 장군은 먼저 적장 다이라를 생포하여 왜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적병을 협곡으로 유도하여 전멸시키는 전법을 세워 8월 7일 밤에 성공적인 작전 수행을 통해 둔덕대첩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둔덕산 전투에서 패한 왜군이 복수를 위해 고령을 다시 침략하였는데, 7월 15일 고령 도진리 낙동강 양쪽 기슭에 매복한 정기룡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수십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있던 왜군을 물리친 전투가 도진리전투이다. 정기룡 장군은 8월 16일 이른 새벽에 용담천(龍澹川)[현 고령군 쌍림면 귀원리] 가에서 대치하고 있던 왜군 2만 명을 유인하여 격전을 벌인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용담천전투에서 왜군 2만의 대병력이 불과 4,000명의 아군에게 참패하여 살아서 도망간 자가 겨우 500명에 불과하였다. 왜군은 병력과 무기가 월등하였으나, 이동현(李同峴)이 지형을 이용한 전략을 펴 평지에서 공격하는 왜군을 높은 구릉에서 내려다보면서 사격하여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용담천의 대첩을 두고 도체찰사 이원익정기룡 장군에 대해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명장이라며 극찬하였다.

[결과]

둔덕전투와 도진리전투에 이어 용담천전투에서 정기룡 장군이 대승을 거두자 고령 이하 다섯 군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이 퇴각함으로써 국토를 회복할 수 있었고, 정기룡 장군은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경상우병사에 오르게 되었다. 이리하여 왜장 가토 군대는 9월 20일 상주에서 남하하여 10월 3일에는 울산으로 철수하였고,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왜군도 후퇴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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