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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370
한자 丙子胡亂
영어음역 Byeongjahoran
영어의미역 Byeongja War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쟁
발생(시작)연도/일시 1636년 12월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637년 1월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상북도 고령군
관련인물/단체 인조|청 태종|죽포(竹圃) 이현룡(李見龍)|이정웅(李廷熊)

[정의]

1636년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여 일어난 전쟁.

[발단]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뒤 후금(後金)과 조선은 형제지국(兄弟之國)으로서 평화유지를 약속했으나 조선은 해마다 많은 액수의 세폐(歲弊)와 수시의 요구에 감당하기 힘들었으며, 당시 강력한 숭명배금(崇明排金) 사상으로 후금과의 형제 관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후금은 점차 영역을 확대하고, 명나라를 압박하는 과정에서 ‘형제지맹’을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치려 했고 세폐도 대폭 늘리고 정병(正兵)까지 무리하게 요구해 왔다. 1636년 4월에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조선에 대해 군신지의를 요구하면서 수용하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거듭 위협했다.

[경과]

청태종은 1636년 12월에 직접 조선 침략을 감행했다. 이때 청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복종시켜서 후일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게 될 때 후환을 없애기 위한 대비 차원이었다. 청나라가 침입하자 인조는 왕자와 비빈을 강화도로 피난시키고, 뒤따라가려 하였으나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이때 청나라는 이듬해 정월 1일에 남한산성 아래의 탄천(炭川)에서 12만 명의 청군을 결집하고 있었다. 전투는 없었으나 혹한의 계절에 남한산성에는 군량도 부족하고, 포위를 뚫을 구원병도 오지 않는 절박한 상황에서 하는 수 없이 주화파의 주장을 좇아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때 조선은 명나라와의 단교, 소현세자의 인질, 청에 대한 신례(臣禮), 청이 명을 칠 때 원병 파견 등을 약속하였다.

중화사상이 지배적 사상 체계로 자리 잡힌 조선에서 청나라에 대한 항복은 조선 역사상 가장 큰 패배였고, 굴욕 그 자체였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해 오자 고령에서도 청나라의 침략에 대한 항거가 일어났다. 먼저, 고령의 유학자 죽포(竹圃) 이현룡(李見龍)이 청나라 군대를 치기 위한 의병을 일으켰다.

이현룡은 일찍이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후에는 인평대군의 사부가 된 사람이었다. 관직으로는 군위(軍威)·대흥(大興)·유화(儒化) 등지의 현감을 지냈다. 또한 성산 사람인 이정웅(李廷熊)이 조선 인조가 청의 태종에게 항복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정웅은 고령을 비롯한 9개의 군현에서 훈도로서 성리학을 가르치는 교육에 종사한 인물이었다. 이정웅은 청군에 침략에 저항하던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의식을 행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에 못 이겨 자결을 택했다. 이에 세상 사람들은 자결한 이정웅을 가리켜 절의사(節義士)라고 칭송하였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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