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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386
한자 三一運動
영어음역 Samirundong
영어의미역 The 1919 Samil Independence Movement of Korea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19년 3월 말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19년 4월 초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상북도 고령군
관련인물/단체 배기석|박재필|박채환|박기로|최경현|박영화|박차천|한이군|한용발|도말용|박용학|한광룡

[정의]

1919년 3월 말~4월 초 고령 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 시위.

[개설]

3·1운동은 서울에서부터 시작되어 5월 중순까지 비폭력·일원화·대중화 등을 원칙으로 하여 전국에서 발생하였고, 한국인이 거주하는 하와이 등 국외에서도 발생하였다. 대도시에서 농촌에 이르기까지 청년·학생과 지식인, 농민과 노동자, 여성 등 전 민족적 항일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3·1운동의 역량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다.

[역사적 배경]

3·1운동은 국내외의 긴박한 정세에서 발생의 배경을 찾을 수 있다. 1914년 일어난 제1차 세계 대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변화된 세계정세는 민족 문제에 대한 자각을 높이고 한반도를 비롯한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을 고무시켰다. 1918년 1월 제1차 세계 대전을 마무리하는 원칙으로 미국 윌슨 대통령이 내걸은 민족 자결 주의도 식민지 피억압 민족에게 독립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일제는 강제적으로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뒤 ‘군사적 제국주의’ 차원의 폭력성이 내포된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일제는 식민지 수탈 구조의 구축 작업을 추진하였는데, 먼저 식민지 조선의 금융 지배를 위해 화폐 정리 사업을 착수하였다. 근대적 운송망의 구축 역시 일제가 일찍부터 착수한 것인데, 경부선 철도의 부설이 그것이다. 이에 고령은 낙동강 수운을 통한 경제 활동에 타격을 입게 되었다.

또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해 일제 자본의 자유로운 농촌 침투와 그 지배를 실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령 지역의 많은 토지 소유권이 일제로 바뀌는 결과를 낳음과 동시에 식민지 지주제가 관철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는 이런 정책의 온전한 수행을 위해 모든 행정력과 경찰력을 동원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제의 폭압성과 강제력이 자행되어 지역민은 수탈과 지배를 받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경과]

3·1운동은 그간 억눌려 있던 독립 의지가 한꺼번에 분출되면서, 삽시간에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만세 시위운동은 3월 초순에는 서울과 경기를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종교계와 학생층 그리고 중소 상인층이 주도하였다. 3월 중순부터는 차츰 지방의 군 단위까지 번졌다. 3월 말과 4월 초에 이르러 전국적인 시위로 발전하면서 차츰 농촌 내 유지와 농민·노동자들이 운동을 이끌었다.

고령 지역의 만세 시위운동도 전국적 흐름에 연계되어 3월 말~4월 초에 집중되었다. 고령 지역에서는 3월 말 고령군 쌍림면 매촌리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다가 사전에 적발되어 실행되지 못하였다. 3월 29일 덕곡면 원송리에서 청년 배기석의 주도로 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났으며, 4월에 우곡면에서는 수차례 만세 운동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4월 6일 우곡면 도진리에서 고령박씨 문중 행사 때 박재필의 주도로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고, 4월 8일 박채환의 주도로 만세 운동이 있었다. 이 시위에 자극받아 박기로 등의 청년들이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과 독립 만세를 외쳤다.

[결과]

고령군의 만세 시위는 운동 주도자와 참여자의 상당수가 일제 관헌 당국에 체포되어 탄압을 받았다. 쌍림면최경현이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고, 덕곡면배기석은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우곡면의 시위에서는 박재필·박영화·박차천 등이 구속되었고, 그중 박채환은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렀다. 또 우곡면박기로는 징역 1년, 한이군·한용발·도말용·박용학·한광룡 등은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3·1운동은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민족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전개된 거족족인 항일 민족 운동이었다. 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한 지역민들은 강력한 반일 투쟁심과 높은 독립 의지로 치열한 투쟁을 벌였지만, 일제의 강력한 탄압에 좌절을 겪었다. 그럼에도 고령 지역에서도 독립의 의지가 발현되어 새로운 형태로 지속적인 민족 운동이 전개될 것임을 알게 하였다. 나아가 민족 운동의 지도 기관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립에 일조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된 항일 운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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