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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590
한자 靈淵書院廟庭碑
영어의미역 Monumental Stone in Yeongyeon Confucian Academy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사촌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병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비석
건립시기/일시 조선시대
관련인물 신덕린|박은|정사현|홍익한|김수옹
재질 석재
높이 162㎝[비신]
너비 61㎝[비신]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사촌리 지도보기
소유자 고령군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사촌리 영연서원 터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비석.

[개설]

서원(書院)은 선현에 대한 제사와 유생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였던 조선시대의 사설 교육기관이었다. 조선시대 최초의 서원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였던 주세붕(周世鵬)안향(安珦)을 향사하기 위해 영주에 세운 백운동서원이었다. 이후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이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을 추진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서원은 사림의 강학 기구에만 그치지 않고 강학 활동을 매개로 향촌 사림 사이의 지면을 익히고 교제를 넓히는 곳이자, 향촌 운영 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서원 교육은 성리학적이고 도학적인 내용이 중심을 이루었으며, 선현을 향사하는 기능도 함께 수행하였다.

[건립경위]

1711년(숙종 37)에 영연서원을 건립하여 순은(醇隠) 신덕린(申徳隣),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 월담(月潭) 정사현(鄭師賢) 3현을 향사(享祀)하였다. 고령군 운수면 운산리[구음리]의 운천서원(雲川書院) 역시 동시에 건립한 건물로 화포(花浦) 홍익한(洪翼漢)을 봉사하다가 서원의 유지가 곤란하여 위판(位版)만 영연서원으로 옮김과 동시에 기재(棄齎) 김수옹(金守雍)을 추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고 현재는 묘정비만 남아 있다.

신덕린은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고 문학과 행실이 탁월하여 정몽주, 이색, 길재 등과 교우하여 세칭 6은(隱) 가운데 한 사람이라 하였다. 한때 강화도로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복직 후에 보문각직제학을 사양하고 전라남도 곡성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진력하였다.

박은은 17세 때 소과에 합격, 18세에 홍문관수찬에 발탁되어 직언으로 조정에 이름을 떨쳤으나 갑자사화 때 27세의 나이로 사형을 당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총명하고 문장이 탁월하여 천하기재(天下奇才)라 부르며 애석하게 여겼다. 홍익한은 1624년(인조 2) 문과에 장원하고 병자호란 때는 척화를 주장하다가 윤집(尹集), 오달제(呉達濟)와 같이 청나라에 잡혀가 갖은 유혹과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아 참형되었다.

[위치]

영연서원 묘정비대가야읍에서 지방도 67호선을 따라 가다가 개진면우곡면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우측 주유소를 끼고 개진 방향으로 1㎞ 정도 가면 왼쪽 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도로보다 약간 낮은 곳에 있고 비각 좌측으로 낮은 야산을 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급회전하는 위치에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형태]

비각은 낡은 철 대문과 돌담에 기와를 얹은 사각의 담장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비각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인 맞배지붕 형태이다. 비석의 전면 상단에 ‘영연서원 묘정비(靈淵書院廟庭碑)’가 가로로 음각되어 있고 그 아래 세로로 사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묘정비문은 1734년(영조 10)에 이조판서를 지낸 서유방(徐有防)이 지었다.

비석은 받침, 비신, 이수를 갖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크기는 받침이 108×71㎝로 바닥보다 조금 높은 자연석 돌에 세웠다. 비신은 높이 162㎝, 너비 61㎝, 두께 28㎝이고, 이수는 높이 89㎝, 너비 64㎝, 두께 45㎝ 정도로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조각이 새겨져 있다. 지금은 비석만 남아 있지만, 한때 고령 지역의 선현을 제사지내고 사람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던 서원의 자취를 느끼게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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