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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594
한자 高靈郡廳內碑石群
영어의미역 Memorial Monuments in Goryeong county office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190[왕릉로 55]
시대 조선/조선,근대/근대
집필자 김용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비석군
양식 지붕형|호패형|귀접이형
건립시기/일시 조선시대|근대
관련인물 정창시|이희택|이만징|구문유|민휘사|민수용|박대|송순혁|임시익|조시|송장진|이수겸|이봉조
재질 화강암
높이 161㎝[정후창시청덕비]|164㎝[현감이후희택애민선정비]|147㎝[현감이후만징□□□]|129㎝[현감구후문유청덕애민선정비]|109㎝[현감민후휘사응선정유애비]|117㎝[현감민후수용애민선정비]|145㎝[현감박후대수영세불망비]|123㎝[현감송후순혁영세불망비]|91㎝[현감임후휘시익선정불망비]|117㎝[군수조공시영영세불망비]|112.5㎝[군수장후덕근영세불망비]|80㎝[현감이후수겸선정비]|114㎝[군주사이공봉조송덕비]
너비 45㎝[정후창시청덕비]|44㎝[현감이후희택애민선정비]|50.5㎝[현감이후만징□□□]|50.5㎝[현감구후문유청덕애민선정비]|39㎝[현감민후휘사응선정유애비]|44.5㎝[현감민후수용애민선정비]|49.5㎝[현감박후대수영세불망비]|42㎝[현감송후순혁영세불망비]|40㎝[현감임후휘시익선정불망비]|43㎝[군수조공시영영세불망비]|38㎝[군수장후덕근영세불망비]|34㎝[현감이후수겸선정비]|45.5㎝[군주사이공봉조송덕비]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190[왕릉로 55]지도보기
소유자 고령군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에 있는 조선시대 및 근대 비석군.

[건립경위]

고령군청 내 비군의 13기 비석의 건립 연대 및 관련 인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후창시 청덕비(鄭侯昌詩淸德碑)는 1907년 4월에 건립되었다. 정창시(鄭昌詩)는 팔거인(八莒人)이며, 경상남도 거창군 강동 사람으로 1647~1649년에 고령현감을 거쳐 이조정랑에 오른 인물이다. 묘소는 대가야읍 외동 뒷산에 있다.

현감 이후희택 애민선정비(縣監李侯喜澤愛民善政碑)는 1681년 11월에 건립되었다. 이희택(李喜澤)은 1680~1682년에 고령현감을 지내면서 서정쇄신으로 민심을 안정시키고 농사를 권장하였다. 현감 이후만징 □□□(縣監李侯萬徵□□□) 비는 1686년 7월에 건립되었다. 이만징(李萬徵)은 1685~1686년 고령현감을 지냈다. 현감 구후문유 청덕 애민 선정비(縣監具侯文游淸德愛民善政碑)는 1704년 5월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문유(具文游)는 능성인(綾城人)으로 1691~1696년 고령현감을 지냈으며, 고령향교 발전에 공헌하였다.

현감 민후 휘사응 선정 유애비(縣監閔侯諱師膺善政遺愛碑)는 1820년 12월 20에 건립되었다. 이 비의 주인은 1807~1809년 고령현감을 지낸 민사응(閔師膺)으로 재임 기간 동안 어진 정사를 펴서 경상감영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임기를 마치고 무진년에 전출되니 고을 사람들이 비를 세웠는데 홍수에 없어졌다. 민사응이 죽은 지 73년에 그 손자인 현풍현감 민종렬 등이 다시 세웠다.

현감 민후수용 애민 선정비(縣監閔侯洙龍愛民善政碑)는 1835년 10월에 건립되었다. 이 비의 주인은 1834~1836년 고령현감을 역임한 민수용(閔洙龍)으로 재임 기간 동안 선정을 베풀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 마을을 잘 이끌었다. 현감 박후대수 영세불망비(縣監朴侯岱壽永世不忘碑)는 1875년 2월에 건립되었다. 박대수(朴岱壽)는 1855~1857년 고령현감을 지냈으며,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현감 송후순혁 영세불망비(縣監宋侯淳爀永世不忘碑)는 1888년 11월에 건립되었다. 송순혁(宋淳爀)은 1890~1891년에 고령현감을 지냈다. 곧은 지조로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들의 괴로움을 걱정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현감 임후 휘시익 선정불망비(縣監林侯諱時益善政不忘碑)는 1905년 3월에 건립되었다. 임시익은 1892~1894년에 고령현감을 지냈다.

군수 조공시영 영세불망비(郡守曺公始永永世不忘碑)는 1896년 12월에 건립되었다. 1896~1899년 군수를 지낸 조시영(曺始永)은 정치에 민첩하고 문학에 고상하였다. 사민(四民)에 구별 없이 세금을 균일하게 매기고 묵은 폐단을 일소하니 송덕의 소리가 높았다. 그 뒤 관찰사로 영전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경상남도 진주 선화당을 건립하였다.

군수 장후덕근 영세불망비(郡守張侯悳根永世不忘碑) 1902년 2월에 건립되었다. 현감 이후수겸 선정비(縣監李侯秀謙善政碑)의 건립 연대는 현간 재임 중이거나 물러난 직후로 추정되나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군주사 이공봉조 송덕비(郡主事李公鳳朝頌德碑)는 1908년 8월에 건립되었다. 이봉조(李鳳朝)는 고령인으로 1906~1908년 군주사(郡主事)를 지냈다. 관개 수리 시설 확충으로 송덕비가 세워졌다.

[위치]

원래 옛 군청 자리에 있던 것을 새로 고령군청을 지으면서 보존 관리를 위해 고령군청대가야국악당 사이에 정원을 조성하고, 조선시대와 근대에 만든 석비 13기를 옮겼다.

[형태]

정후창시 청덕비는 이수(螭首)를 갖추었으며, 높이 161㎝, 너비 45㎝, 두께 16㎝이다. 현감 이후희택 애민선정비는 연화형 지붕을 갖추었으며, 높이 164㎝, 너비 44㎝, 두께 18㎝이다. 현감이후만징□□□ 비는 호패형으로 비신의 상단 우측이 훼손되고, 하반부 박락이 심하다. 높이 147㎝, 너비 50.5㎝, 두께 14㎝이다.

현감 구후문유 청덕 애민 선정비는 상단부 지붕 장식이 특이하며, 높이 129㎝, 너비 50.5㎝, 두께 16.5㎝이다. 현감 민후휘사응 선정 유애비는 귀접이형으로 높이 109㎝, 너비 39㎝, 두께 17.5㎝이다. 현감 민후수용 애민 선정비는 호패형으로 높이 117㎝, 너비 44.5㎝, 두께 10㎝이다. 현감 박후대수 영세불망비는 귀접이형으로 높이 145㎝, 너비 49.5㎝, 두께 16.5㎝이다. 현감 송후 순혁 영세불망비는 귀접이형으로 높이 123㎝, 너비 42㎝, 두께 13㎝이다.

현감임후휘시익선정불망비는 귀접이형으로 높이 91㎝, 너비 40㎝, 두께 13㎝이다. 군수조공시영영세불망비는 호패형으로 높이 117㎝, 너비 43㎝, 두께 14㎝이다. 군수장후덕근영세불망비는 귀접이형으로 높이 112.5㎝, 너비 38㎝, 두께 13.5㎝이다. 현감 이후수겸 선정비는 호패형으로 높이 80㎝, 너비 34㎝, 두께 13㎝이다. 군주사 이공봉조 송덕비는 귀접이형으로 높이 114㎝, 너비 45.5㎝, 두께 19㎝이다.

[금석문]

정후창시 청덕비는 비석 정면 중앙에 세로로 ‘정후창시 청덕비(鄭侯昌詩淸德碑)’라는 대자(大字)가 있고 그 우측과 좌측에 ‘광무십일년정미사월일후손공릉참봉태균희상찬수(光武十一年丁未四月日後孫恭陵參奉泰均禧相撰修)’라 하고 건립과 관련해서는 ‘경인정월일입(庚寅正月日立)’이라 새겨져 있다. 현감 이후희택 애민 선정비는 비석 정면 중앙에 세로로 ‘현감 이후희택 애민 선정비(縣監李侯喜澤愛民善政碑)’라는 대자가 있고 소자(小字)로 ‘임술십일월립(壬戌十一月立)’이라 새겨져 있다.

현감 이후만징 □□□ 비는 비석 정면 중앙에 세로로 ‘현감 이후만징 □□□(縣監李侯萬徵□□□)’이라는 대자가 있고, 비의 상반부 좌우에는 ‘신정상렴백리위춘(新政尙廉百里爲春)’이라 새겨져 있다. 나머지 내용은 비면의 박락으로 판독이 불가능하다. 현감 구후문유 청덕 애민 선정비는 비석 정면 중앙에 세로로 ‘현감 구후문유 청덕 애민 선정비(縣監具侯文游淸德愛民善政碑)’라는 대자가 있고, 왼편에 세로로 된 소자에 ‘갑신오월일립(甲申五月日立)이라 새겼다.

현감 민후휘사응 선정 유애비는 비석 정면 중앙에 세로로 ‘현감 민후휘사응 선정유애비(縣監閔侯諱師膺善政遺愛碑)’라는 대자가 있고, 정면 좌우에 세로로 새긴 소자는 ‘조부이정묘년재시읍문학위정인명위민상민언일어영포렴아즉등제수계개실적야무인이사체현지인사표석이사지구입어치지남전료이실불초래수인현거공거읍칠십유삼계경위일심구부영민이무전추급호우시교향기리지손약증추수일석료비관첨운세경진십월이십일손현풍현감종열지유학김수경신익권상역리이상육유임순김정권동립공생김희철서(祖父以丁卯年宰是邑文學爲政仁明爲民詳敏焉溢於營褒廉雅則登諸繡啓皆實績也戊寅以事遞縣之人士表石以思之舊立於治之南傎潦而失不肖來守鄰縣距公去邑今爲七十有三季竟爲一審懼夫永泯而無傳諏及乎于時校鄕曁吏之孫若曾追竪一石聊備觀瞻云歲庚辰十月二十日孫玄風縣監種烈識幼學金秀璟申益權相役吏李尙堉兪任淳金政權董立貢生金喜喆書)’라고 새겨져 있다.

현감 민후수용 애민선정비는 비석 정면 중앙에 세로로 ‘현감 민후수용 애민선정비(縣監閔侯洙龍愛民善政碑)’라는 대자가 있고, 그 좌우측에 세로로 다음과 같은 소자가 있다. ‘경제지재충신기덕기반하읍우치폐국소시할계기감유적만구지명일편지석(經濟之材忠臣其德旣絆下邑又値弊局少試割鷄己感乳翟萬口之銘一片之石)’이라 하고, 비의 우측 하단에 ‘병신하며(丙申下旀)’라 새겼다.

현감 박후대수 영세불망비는 비석 정면 중앙에 세로로 ‘현감 박후대수 영세불망비(縣監朴侯岱壽永世不忘碑)’라는 대자가 있고, 그 좌우측에 세로로 새긴 소자는 ‘가이명위왈전중온아군자인혜춘허백리초상지풍혜전우석서불□미산가야지수약[려]여대혜정사 이월립(歌而銘爲曰典重溫雅君子人兮春噓百里草上之風兮鐫于石誓不□美山伽倻之水若[礪]如帶兮丁巳二月立)’이다. 풀이하면 “노래하고 장단 맞춰 가로되 정중하고 온순한 사람이여 봄바람 풀 위에 부는 것 같아 군민에게 고루고루 덕을 입혔으니 이 사실이 새겨진 비석이며 구미 산과 가야 물이 둘러싸고 우뚝하도다. 정사년 이월에 세우다.”이다.

현감 송후순혁 영세불망비는 비석 정면 중앙에 세로로 ‘현감 송후순혁 영세불망비(縣監宋侯淳爀永世不忘碑)’라는 대자가 있고, 그 좌우측에 세로로 새긴 소자는 다음과 같다. ‘아조성덕복로초야유애존신쾌활겸민번수도감절충김유권색리공생박상복송재석호장박두민이방김희국무자지월일삼리보입(雅操盛德服勞焦野遺愛存神快活歉民番水都監折衝金有權色吏貢生朴尙馥宋在錫戶長朴斗玟吏房金熺國戊子至月日三里洑立)’ 비석을 세울 당시 도감, 색리, 호장, 이방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어 연구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

현감 임후휘시익 선정 불망비는 비석 정면 중앙에 세로로 ‘현감 임후휘시익 선정 불망비(縣監林侯諱時益善政不忘碑)’ 라는 대자가 있고, 그 좌측에 세로로 ‘을사삼월일수립(乙巳三月日竪立)’이라 새겼다.

군수 조공시영 영세불망비는 비석 정면 중앙에 세로로 ‘군수 조공시영 영세불망비(郡守曺公始永永世不忘碑)’라는 대자가 있고, 그 오른편에 ‘혜정포민거포초운폐국갱완송성원문(惠政蒲民 巨逋草耘 弊局更完 頌聲遠聞)’이라 하고, 오른편과 왼편 하단에 ‘감관박상복색리이두육호장정창하이방이지형(監官朴尙馥色吏李斗堉戶長鄭昌河吏房李志亨)’이라 새겼다. 좌측 상부에는 ‘병신십이월일리청립(丙申十二月日里廳立)’이라 새겼다.

군수 장후덕근 영세불망비는 비석 정면 중앙에 세로로 ‘군수 장후덕근 영세불망비(郡守張侯悳根永世不忘碑)’라는 대자가 있고, 소자로 새긴 내용은 비석 표면의 마모로 글자 판독이 어렵다.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환산화추민막유약소천홍혁세한미우□토예축소재부생오두이배영소광휘임인이월일읍내립(環山和推民瘼有藥䟽川鬨洫歲旱靡雨□土豫蓄蘇堤復生烏頭螭背永炤光輝壬寅二月日邑內立)’

현감 이후수겸 선정비는 비석 정면 중앙에 세로로 ‘현감 이후수겸 선정비(縣監李侯秀謙善政碑)’라는 대자가 있고, 소자로 새긴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소겁이후만구성비제증기□백구유사각면약정립(召抾以後萬口成碑齊曾其□百口有辭各面約正立)’

군주사 이공봉조 송덕비는 비석 정면 중앙에 세로로 ‘군주사 이공봉조 송덕비(郡主事李公鳳朝頌德碑)’라는 대자가 있고, 소자로 새긴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노공급택인류출구개관수의가색무우주선순모제독병력일석농담영세선석동공백익대김희율김규학박성문융희이년무신팔월일가라평보중립(勞功及沢引流出溝漑潅随意稼穡無憂周旋詢謀斉督並力日夕農談永世宣石同功白翊大金熹律金奎学朴星文隆煕二年戊申八月日伽羅坪洑中立)

[현황]

13기의 비석은 고령군청 앞 주차장에서 대가야국악당 방향 20m 정도의 지점에 있으며, 좁은 도로 왼편에 어른 허리 높이 정도의 위치에 기단부를 설치하여 가지런히 줄지어 세웠다. 군청에 인접하여 보존 관리는 양호한 편이며, 비석마다 기단부 앞쪽에 자그마한 오석을 두어 비석의 주인공에 대한 간단한 이력을 한글로 새겨 두었기에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은 도로에 너무 인접해 있어 관람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왼편에서 세 번째에 위치한 현감 이후만징 □□□ 비는 하반부 박락이 심하여 수리가 요망된다.

[의의와 평가]

비석을 보존 관리하기 편하고 추가 훼손을 최소화할 수 있는 안전한 곳에 모아두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역대 현감 등의 공적을 통해 지방사를 연구하는 자료로서 유용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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