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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844
한자 吳澐
영어음역 O Un
이칭/별칭 죽유(竹牖),죽계(竹溪),백암노인(白巖老人),율계(栗溪)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 96-2[송림2길 70]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용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지도보기
성별
생년 1540년연표보기
몰년 1617년연표보기
본관 고창
대표관직 공조참의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고창(高敞). 자는 대원(大源), 호는 죽유(竹牖)·죽계(竹溪)·백암노인(白巖老人)·율계(栗溪) 등이다. 고려 중기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오학린(吳學麟)[1009~?]을 시조로 삼는다. 10대조 오세문(吳世文)은 동각학사(東閣學士)를 지냈는데, 고려 무신란 직후 해좌칠현(海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활동한 오세재(吳世才)의 형이다. 증조할아버지 삼우대(三友臺) 오석복(吳碩福)이 만년에 의령현감을 지낸 뒤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에 정착하게 되어 함안 사람이 되었다. 함안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부인 선산김씨(善山金氏)의 외가가 함안에 있었고, 아들 오언의(吳彦毅)의 동서 조효연(曹孝淵)이 창원에 살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전의현감을 지낸 오언의이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堣)[1469~1517]의 사위가 되어 퇴계와 어릴 때부터 교유하였고, 두 집안이 서로 관계가 깊었다. 아버지는 병으로 벼슬살이를 하지 못하고 조행(操行)에만 힘쓰며 집에서 지냈다. 어머니는 취우정(聚友亭) 안관(安灌)의 딸로, 안관은 고려 말 문신 근재(謹齋) 안축(安軸)의 후손으로 기묘사화 이후 서울에서 낙향하여 재지사족(在地士族)으로서 기반을 넓혀 갔다. 처숙부 죽당(竹堂) 허윤렴(許允廉)은 안관과 동서 관계이다.

장인은 몽재(蒙齋) 허사렴(許士廉)이다. 허사렴퇴계 이황의 맏처남으로 퇴계를 따라 배워 생원과 진사 양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시문에도 능하였다. 의령 가례동천에 살았는데, 많은 전장(田莊)과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아들이 없고 딸만 둘 있어 오운(吳澐)이 집과 전장을 상속받았다. 그 때문에 오운의 집이 가례에 있게 되었다. 그의 일호인 백암(白巖)은 가례동천이 있는 마을 이름이다. 오운퇴계 처남의 사위가 되므로, 퇴계에게는 처조카 사위가 된다. 아들로 오여은(吳汝檼)을 두었다.

[활동사항]

오운[1540~1617]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에서 태어났다. 6세 때부터 할아버지 오언의에게 글을 배웠는데, 문재(文才)가 탁월하였다. 1558년(명종 13) 19세에 경상남도 김해 산해정(山海亭)으로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찾아 제자가 되었다. 이때 남명은 삼가(三嘉) 토동(兎洞)에서 강학하던 시기였지만, 산해정에서도 가끔 강학하였다. 25세 때 도산서당(陶山書堂)으로 이황을 찾아 제자가 되었는데, 인재로 인정받았다.

27세 때인 1566년(명종 21)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에 제수되어 출사하기 시작하였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개암(開巖) 김우굉(金宇宏)퇴계 문하의 동문들과 함께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4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성균관학록(成均館學錄)까지 승진하고 31세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지냈다. 그사이에 이황조식 두 선생의 상을 만났고, 또 조모상과 부친상 등으로 상중에 있었다. 37세 때 탈상하고 다시 성균관박사로 부름을 받아 관직에 복귀하였다. 그 이듬해 성균관전적으로 승진하였고, 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으로 옮겼다. 겨울에 휴가를 받아 귀향하다가 고령에 이르러 쾌빈루(快賓樓)에 올라 진외증조부(陳外曾祖父)[아버지의 외조부]가 되는 송재 이우의 시에 차운(次韻)하였다.

오운이 고령 땅을 밟은 기록으로는 이때가 처음이다. 이해 겨울에 명천현감으로 나갔다가, 그 이듬해 체직(遞職)되어 의령으로 돌아와 가거(家居)하였다. 부인의 고향인 가례동촌은 이황이 쓴 ‘가례동천(嘉禮洞天)’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는 곳으로 산수가 빼어났다. 오운은 백암대(白巖臺)를 쌓고 참된 산수의 정취를 즐겼다.

1580년(선조 13) 41세 때 다시 성균관전적으로 나아가 정선군수를 거쳐 충주목사 겸 춘추관편수관에 제수되었다. 팔봉서원(八峰書院)을 세워 그 지역 출신인 음애(陰崖) 이자(李耔),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을 향사(享祀)하였다. 서원을 세워 선현을 향사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운동을 크게 일으킨 이황의 뒤를 이어 오운도 서원 창설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던 것이다.

45세 겨울에 파면되어 의령으로 돌아왔다. 당시 충주목(忠州牧)에는 감사(監司) 일가와 관련이 있어 여러 전임 목사가 해결하지 못한 송사가 있었는데, 오운이 원칙대로 판결하면서 감사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파면되었다. 1588년(선조 21) 49세에 성균관사성으로 부임하였다가, 이듬해 광주목사로 나갔으나 2년 만에 파면되어 돌아왔다. 이처럼 자주 파면을 당한 이유는 정의를 지켜 시속에 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격은 스승인 조식으로부터 물려받은 바가 많았다고 하겠다.

1592년(선조 25) 53세에 의령의 집에 있다가 임진왜란을 맞았다. 단시일에 여러 고을이 와해되고 고을원이나 병사들은 대부분 도망가 숨어 버렸으며, 왜적들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왔다. 이때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과 남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왜적을 격멸하였다.

그리고 경상도 초유사(招諭使)로 부임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맞이하여 인도하였다. 학봉과는 퇴계 문하의 동문일 뿐 아니라, 학봉의 아들 김집(金潗)은 둘째아들 오여벌(吳汝橃)의 장인이었으므로 오운과는 사돈 관계가 되었다. 경상우도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김성일에게 오운이 큰 도움을 주었다. 김성일오운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임명하여 흩어진 병사들을 불러 모아 재편성하도록 하였다.

1593년 4월 김성일이 병들어 위독해지자 진주성으로 들어가 문병하였고, 투병 끝에 별세하자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송암(松巖) 이로(李魯) 등과 함께 시신을 수습하여 가매장하였다. 이해 상주목사로 임명되었으나, 얼마 있지 않아 병으로 사직하고 경상북도 영주 초곡(草谷)으로 돌아왔다. 허사렴의 아버지 진사 허찬(許瓚)은 영주에 살던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의 맏사위였다. 문경동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둘 있어 집과 전장을 허찬이 물려받게 되었는데, 허찬의 재산도 자연히 맏아들인 허사렴에게 상속되었다. 허사렴의 재산이 다시 오운에게 상속되어 영주에도 집과 많은 전장이 있게 되었다.

1595년(선조 28) 56세에 합천군수에 제수되어 부임하였다. 합천은 전란 초기에 전투가 치열하여 극도로 잔폐하였는데, 오운은 부임하여 고을을 복구하고 백성들을 위무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해 4월에 춘추관편수관을 겸임하였다. 사재(史才)를 인정받아 외직에 나가서도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임진왜란 이후로는 영주에 거주하면서 백암(柏巖) 김륵(金玏)과 함께 이황을 향사한 이산서원(伊山書院)의 일을 주도하였고, 따로 산천서당(山泉書堂)을 지어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산천서당은 오운의 사후 영주의 사림들이 산천서원으로 확대하여 그를 향사하였다. 1600년(선조 33) 61세에 문집고성제(文集告成祭)에 참여하여 여러 동문과 퇴계의 학문을 강론하였다.

77세 되던 해 6월에 공조참의에 제수되었지만, 병을 들어 사양하며 부임하지 않고 사직소(辭職疏)를 올렸다. 77세 때 청송부사에 제수되었다. 78세에 재임 중 위병이 점점 심해져 2월에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와 3월 3일 영주의 본가 정침에서 별세하였다.

[학문과 사상]

오운은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있은 지 51년이나 되었지만, 현달하지 못하고 주로 지방관으로 전전하면서 청요직(淸要職)에는 들지 못하였다. 마지막 관직인 청송부사는 44세 때 역임한 목사보다 한 단계 낮은 직책이었다. 대북파(大北派)가 집권한 광해군 대에도 관직은 청송부사로 재직한 4개월이 전부였다. 더구나 대북파의 영수로 광해군의 신임을 독점한 정인홍(鄭仁弘)이 그의 아들 오여은과 사돈지간이었기 때문에 조금만 신경을 썼다면 높은 벼슬을 얻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를 통하여 오운이 현달하기에 급급하지 않았고, 또 성격이 강직하여 시세에 영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저술 및 작품]

45세 때 『송재시집(松齋詩集)』을 간행하였다. 이우의 시 원고를 이황이 편집하여 친필로 정사(淨寫)하여 두었는데, 오운이 자신의 녹봉을 들여 친필 그대로 판각(板刻)하여 간행하였다. 그리고 45세 때 함안군수로 재임중이던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함께 『함주지(咸州誌)』를 편찬하였다. 『함주지』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방지이다. 영주에 머물면서는 임진년과 계사년의 전쟁 상황을 정리하여 『용사난리록(龍蛇亂離錄)』을 저술하였다.

1600년에는 『퇴계문집(退溪文集)』 간행에 참여하여 퇴계 연보를 교정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72세 때 『주자문록(朱子文錄)』을 완성하였다. 주자의 시문은 지부해함(地負海涵)인 탓에 일독하는 데도 한량없는 시간과 노력이 든다. 이런 까닭에 이황이 일찍이 서간 가운데서 긴요한 것을 가려 뽑아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찬하였으나, 다른 문체(文體)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오운이황의 뜻을 이어 주자가 지은 봉사(封事), 소차(疏箚), 잡저(雜著), 서(序), 기(記) 가운데서 학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글을 가려 뽑아 편찬하였다.

1614년(광해군 6) 10여 년 전에 때 편찬한 『동사찬요(東史纂要)』를 개찬(改撰)하여 완성하였다. 『동사찬요』는 단군 조선에서 고려 말까지를 기록한 우리나라의 역사서인데, 편년체와 기전체를 절충한 독특한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3동 1099번지[당시 첩석리] 동산의 곤향(坤向)에 있다. 이곳에는 배위(配位)와 함께 오운 이후 8대까지의 후손 묘소가 있다. 경상남도 함안과 합천 등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묘소를 종손 오주호가 1980년대 초반 2년여에 걸쳐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상훈과 추모]

광해군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부의를 내렸다.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에는 오운 종손가와 오운을 모신 불천위 사당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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