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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국 시대(四國 時代) 알리기는 우리 손으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A020203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동락

[반세기가 넘는 연륜의 대가야향토사연구회]

고령을 찾는 사람들의 눈에 가장 먼저 띄는 것은 주산(主山)의 능선 위로 불쑥 솟은 지산동 고분군이다. 이곳에는 가실왕(嘉實王)을 비롯해 하지왕(荷知王), 이뇌왕(異腦王), 도설지왕(道設智王)의 무덤들도 있을 것이다.

대가야의 왕들이 묻힌 이곳에는 해마다 수많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코흘리개들이 오르내린다. 무덤 사이를 헤집으면서 뛰노는 아이들은 그것이 어느 왕의 무덤인지, 심지어는 ‘대가야’가 어떤 나라인지도 모른 채 이곳저곳을 놀이터로 삼는다. 그러나 이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된 뒤, 어린 시절 뛰놀았던 지산동 고분군의 어느 대가야 왕의 무덤을 기억해 내고 자신의 아이들의 고사리 손을 잡고 다시 고령을 찾게 될 것이다. 이렇게 1600년을 뛰어넘어 대가야의 왕들과 어린 아이들은 시간의 끈에 얽혀 서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만남은 잃어버린 왕국 ‘대가야’를 오늘에 되살리려는 대가야 후손들의 노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희미하게 흔적만 남은 대가야의 역사를 오늘에 되살리고 그 문화와 얼을 이어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대가야향토사연구회’ 회원들이 바로 그들이다. 대가야향토사연구회는 1956년 5월에 처음 설립되었다고 하니, 어언 반세기의 연륜을 자랑한다. 공자(孔子)가 ‘하늘의 명을 알았다’는 지천명(知天命)의 시간 동안, 대가야향토사연구회 회원들은 묵묵히 대가야의 자취를 찾고 그 역사를 지켜 왔다. 그 세월 동안 젊었던 회원들은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되었다.

대가야향토사연구회는 당시 고령에 주재하고 있던 신문사 지국장 겸 기자 9명이 주축이 되어 창립했다. 처음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지국장 집에 돌아가면서 모여 친목을 다지던 것이 모임의 시발점이었다고 한다. 이후 회원들은 친목으로 그치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다고 뜻을 모은 후 대가야의 역사에 대해 토론하고, 고령 지역 유적지를 현장 답사하고 문헌 자료를 섭렵하였다. 그리고 향토 교실을 마련해 찬란했던 대가야의 문화를 이어받고 그것을 널리 알리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대가야향토사연구회의 구체적인 창립 취지는 크게 세 가지였다. 우선, 고장을 바로알고, 고장을 사랑하며, 고장이 필요로 하는 사람 되기 운동을 목적으로 하였다. 고령의 뿌리를 바로 알고, 인멸(湮滅)되기 이전의 대가야 문화를 발굴하여 재조명하고, 향토사 전반을 함께 연구하는 길이 애향이며 애국의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창립된 대가야향토사연구회의 초대 회장은 경미(耕美) 김도윤(金道允) 선생이 맡았다. 사국 시대(四國時代)를 알리기 위한 작지만 큰 발걸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사국 시대론’의 확산을 위한 노력들]

50년 전 당시의 고령 지역에서는 가야나 대가야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었고, 학계에서도 연구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애로 사항이 많았다. 하지만 회원들의 지속적인 연구 활동을 통해 그 동안 고령 지역사, 특히 대가야사를 밝히는 데 수많은 역할들을 수행해 왔다. 그 결과물로 현재까지 대가야 문화 총서 30여 권을 비롯해 140여 권의 저서가 출판되었고, 60여 편 이상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대가야향토사연구회는 그 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을 해 왔다. 1965년에는 박태원(朴太源)[1816~1831]의 문집인 『산천집(山泉集)』을 발굴하였다. 이 문집의 첫머리에는 가야금 12곡을 소재로 만든 「가야금부(伽倻琴賦)」가 수록되어 있다. 가야금 12곡 각각에 대한 감회를 노래하고 있는 글로서, 가야금과 대가야, 고령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다.

1971년에는 연구회의 회원인 조용찬[당시 60세] 씨가 양전동 알터에 있던 양전동 암각화를 발견하여 학계에 소개해 한국 암각화 연구의 시발점을 마련하였다.

1972년에는 합천 야로의 야철 터를 발견했는데, 이는 철의 왕국이었던 대가야가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로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다.

1976년에는 임진왜란 당시 영남 지역 3대 의병장이었던 송암(松庵) 김면(金沔)의 문집과 교지 등을 발견하였다.

이후 대가야향토사연구회에서는 1979년 지산동 44호분의 발굴 성과를 일반에 알릴 수 있는 구(舊) 대가야유물전시관 건립을 추진하였다.

또한 1987년에는 운수면 대평리의 석조여래입상을 발견하여 소개하는 등 수많은 학술적인 개가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각종 강연회를 개최하고 고령 지역을 찾은 각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유적지에 대한 현장 설명을 맡기도 하였다.

지난 2008년 11월 21에서 22일까지 운수면의 그린빌리지호텔에서는 ‘대가야향토사연구회 50주년 기념학술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대가야향토사연구회는 지난 50여 년간의 연구회 활동을 총결산하고 앞으로 맞이할 50년을 준비하기 위한 여러 방안들을 모색했다. 특히, 지금까지 우리나라 고대사를 삼국 시대로 파악했던 것을 반성하고, 대가야를 포함하는 ‘사국 시대론’의 확산을 위해 적극 노력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처럼 대가야향토사연구회는 지난 반세기 동안 고령 지역의 새로운 유적을 새롭게 발견, 소개하는 등 굵직굵직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 점에서 연구회는 대가야의 문화와 역사를 밝히는 연구 단체로 고령 지역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연구 활동을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대가야향토사연구회에 몸 바친 사람들]

이처럼 대가야향토사연구회가 소중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회원들의 열정적인 활동 덕분이었다. 초대 회장을 맡은 김도윤 선생[1956년 취임]을 비롯해 제2대 허동량 회장[1998년 취임], 제3대 이달초 회장[2003년 취임], 제4대 김인탁 회장[2005년 취임] 등의 헌신은 연구회 발전을 견인하는 원동력이었다. 5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연구회 창립 회원들은 많이 작고했지만 회원 수는 오히려 20여 명 이상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지역 주민들의 향토사에 대한 애착이 더욱 강해져 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야의 여러 나라 중 김해의 금관가야와 대가야가 곧잘 대비된다. 금관가야는 나라는 망했지만 그 후손들이 있는 반면, 대가야는 직접적으로 계승한 후손들이 없다. 하지만 향토 역사를 올곧게 계승하려는 고령 사람들 모두가 대가야의 후손임을 자처하고 있다. 특히, 대가야향토사연구회원들의 대가야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누구보다 깊고 넓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까지 가야 문화에 대한 관심은 미약합니다. 앞으로 정부나 지자체 차원에서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지요. 또한 요즘 학생들이나 젊은 세대들에게 향토사란 다분히 따분하고 재미없는 학문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기 고장을 바로 알고 사랑하는 마음인 애향심이 바로 넓은 의미의 애국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대가야향토사연구회의 김인탁 회장의 말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고령의 젊은 세대들이 새삼 되새겨 보아야 할 화두로 다가온다.

김인탁 회장은 앞으로 대가야향토사연구회가 지향해 나갈 방향에 대해서, “대가야 역사·문화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그것을 연구 저서나 논문을 통해 꾸준히 알려 나가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지역 학생들의 애향심 고취를 위해 역사와 문화 교육을 추진할 예정이며, 일본의 역사 왜곡 바로잡기에 힘쓸 것입니다.”라고 다짐했다. 대가야향토사연구회를 통해 되살아나는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가 기대된다.

[정보제공]

  • •  김인탁(남, 1950년생, 대가야향토사연구회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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