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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A030202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연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경용

[어린 가장으로 6·25전쟁에서 살아남다]

서상태 씨는 500년 대가야 도읍 터인 연조리 토박이다. 그는 1932년 봉두골[현 연조2리] 256번지에서 1남 2녀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서상태 씨는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3대 독자로 자라났다. 당시 위로는 한 명의 누나[15세]와 한 명의 여동생[5세]이 있었다. 서상태 씨는 일제 치하에서 고령 금림공립초등학교[현 고령초등학교]를 다녔다.

당시 금림공립초등학교는 한 학년이 30여 명씩 구성된 3개의 학급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생활이 어려웠던 당시에는 초등학교 진학자도 드물어서 10명 중 1명꼴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중학교 진학자는 더욱 귀해서 서상태 씨가 졸업할 당시 한 학년 전체 졸업생 중 단 세 명만이 중학교에 갔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 서상태 씨는 어린 가장으로 줄곧 집안의 농사일을 도왔는데, 14세에 광복을 맞이했다. 19세 때 6·25전쟁이 발발하여 외삼촌이 사는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 근처[가야면 시은리]까지 한 달 동안 피난을 가기도 했다. 당시 정부는 낙동강 방어선 구축을 위해 소개령[피난 명령]을 내린 후 낙동교를 폭파시켰다. 이 때 다리를 건너던 두 명의 마을 사람이 희생되었다.

당시 너무 먼 길을 피난 다니느라 신발이 떨어져 싸리나무나 나무토막으로 만든 슬리퍼를 신기도 했다. 피난길에서 돌아오니 다른 집들은 모두 불탔지만, 서상태 씨의 집은 온전했다. 당시 인민군은 낙동강을 건너 대구 진입을 시도하려고 고령읍내까지 들어와 있었다. 읍내의 중화초등학교는 인민군 본부로 사용되었는데, 당시 국군은 인민군의 도하(渡河)를 막기 위해 이곳에 엄청난 화력을 퍼부었다.

[연조2리 동장을 15년이나 했어]

서상태 씨는 다소 늦은 나이인 26세 때 네 살 아래의 부인과 결혼했다. 이후 곧바로 고령군 농산물검사소에 임시직으로 들어가 5년간 농산물 수매 보조 업무를 담당했다. 정부에서 농민들로부터 벼나 보리 등을 사들일 때 검사원이 품질 등급을 매기면 가마니마다 등급 표식을 찍는 일이었다. 군대 미필로 인해 이 일을 그만둔 후인 32세부터는 동민들의 추천으로 연조2리 동장 일을 15년이나 맡아 했다. 당시 급여는 3~5만 원 정도였으며, 마을 동민들로부터도 가구당 매년 벼와 보리를 각 한 말씩 받았다.

주요 동무(洞務)로는 마을 안길을 넓히고 자갈돌을 까는 공사와 비료를 받아다가 농가에 나누어 주는 일, 산야 조림 사업, 대여 양곡 업무 등이었다. 부역 업무는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가구당 장정 1명씩 의무적으로 노동력을 동원하고 감독하는 일이었는데, 부역자의 등급을 매기고 불참자에 대해서는 벌금을 매겼다. 대여 양곡 업무는 양식이 부족하던 춘궁기에 동민들로 하여금 고령군청으로부터 납작보리를 대여 받아 농사 후에 나락으로 대신 갚게 하는 일이었다. 양식이 부족했던 이른바 ‘보릿고개’ 시절에는 송기[소나무 껍질]나 산야의 나물을 채취해서 떡이나 죽을 만들어 끼니를 잇기도 했다. 서상태 씨는 장기간 공무를 성실히 수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경상북도 도지사와 고령군수 등으로부터 여러 차례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농업협동조합에 근무하며 전답은 소작으로 부치고]

당시 서상태 씨의 집은 논이 여섯 마지기나 있어서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한 ‘중류층’에 속했다. 양식이 부족했던 시절에는 전답의 규모가 계층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 마을 안에 수천 평의 땅을 가진 상류층은 3~4호에 불과했다. 달성서씨 종가집도 3000평[9917.36㎡]의 논을 소유한 상류층이었다. ‘고령 부자’로 이름난 여주이씨 가(家)도 그 중 하나였다. 상류층 농가에서는 보통 2~3명씩의 머슴을 두거나 많은 소작농을 거느렸다.

서상태 씨는 45세부터 고령군 단위농업협동조합 창고 관리인으로 일하기 시작하여 65세까지 계속했다. 서상태 씨는 이처럼 여러 가지 직무를 수행하느라 농사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 모든 농사는 남에게 맡겼다. 지금은 자녀들의 도움 등으로 전답 규모를 2000평[6611.57㎡]으로 늘려 생산량의 절반을 곡수로 받는다. 이로써 돈은 만들지 못해도 집안 양식은 충당한다.

[3대 가족 6명이 오순도순 살다]

서상태 씨의 슬하에는 3남 2녀의 자녀가 있다. 세 아들은 모두 교육계와 경찰, 군청 등에서 공무원으로 일한다. 지금은 고령군청에 근무하는 막내아들과 손자·손녀 등 3대 가족 여섯 명이 평생 동안 살아온 봉두골 가야아파트에서 오순도순 함께 살고 있다.

며느리들이 모두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부인이 현재 살고 있는 이 집에서 손자·손녀를 여섯 명이나 길러 왔다. 그의 집 근처에는 옛 대가야 왕궁 터와 궁궐의 식수원이던 왕정(王井) 등이 남아 있어 500년 도읍지의 기운이 성성하다.

[정보제공]

  • •  서상태(남, 1932년생, 고령읍 연조2리 주민, 전 연조2리 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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