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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A030203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연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경용

연조리에는 오래 전부터 지산 고분을 오르며 장삿길을 열었던 고령 보부상의 후예들이 많다. 이들은 대가야 시대 선조들이 낙동강을 따라 세계로 나아갔듯이, 튼튼한 다리 하나로 온갖 물건들을 이고 지고 전국 방방 곳곳으로 다녔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고령 보부상의 후예들은 지산 고분을 넘고 또 넘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어려운 가세를 일으키고 부모 봉양과 자녀 교육을 시켰다. 이처럼 고령 보부상의 끈질긴 생명력은 오늘날 고령상무사기념관으로 되살아나 대가야의 터전을 굳건히 하고 있다.

[농한기에 도부장사 안 한 사람이 없어]

여성의 몸으로 30여 년간 도부장사와 채소 노점을 해 온 김연화 씨도 분명 고령 보부상의 후예 중 한 사람이다. 1947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면 수곡1리에서 4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난 김연화 씨는, 고령에 살던 삼촌의 중매로 22세 때 이곳 대가야의 도읍 터로 결혼해 와서 지금까지 줄곧 연조리에서 살고 있다. 남편 오동춘[1940년생] 씨는 김연화 씨보다 6세 연상으로서 3남 2녀 중 차남이다. 김연화 씨는 결혼 후 시가에서 3년 동안 부모를 모시다가 같은 마을[연조2리]로 분가해 나왔다.

“결혼해 오니 집도 다 찌그러지고 그랬지만, 당시가 더 살기가 좋았던 것 같아요. 아이들이 크고, 걱정거리가 많아 그런지…….”라는 그녀의 말은 그간의 삶이 간단치만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시집오니 시어른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농한기에는 전국 각처를 다니며 양말을 팔러 다녔다. “우리 동네에 도부장사 안 한 사람이 없어요. 자녀들 키울 때는 모두 다요. 농사는 있어도 돈이 안 되니까요.”라는 말처럼, 이웃하는 많은 사람들도 물건을 이고지고 그렇게 다녔다. 농사만으로는 생활하기가 팍팍한 부분도 있었겠지만, 농한기를 활용하는 근면성과 걸어서 더 넓은 세상과 소통하고 개척하는 적극성이 돋보인다. 무엇보다도 고령 보부상의 피가 그들을 가만두지 못했던 것 같다.

김연화 씨가 장삿길을 걸은 것은 올해 서른셋인 막내딸이 서너 살 되던 35세 무렵부터다. 때로는 어린 아이를 업고 다니면서도 장사를 했다. 노점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약 2년 정도 시어른들이 다니던 길을 따라 남편과 함께 양말 도부꾼을 했다. 전라남도 완도를 비롯해 경상남도 고성과 충무 그리고 남해 바다의 욕지도 등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곳곳을 다녔다. 인근으로는 낫질이나 쌍림 등지로 다니면서 갈치나 사과를 팔았다. 결국 벌이가 시원찮아 도부장사를 2년 정도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로부터 고령장터로 이어지는 노점거리에서의 채소 노점이 시작됐다.

[도부장사에서 채소 노점으로 바꾸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했지요. 돈 쪼매 생기면 쪼매씩 챙겨 가고요.”라는 말처럼, 노점을 시작하던 초기에는 집에서 농사지은 것들만 팔았다. 손수 농사지은 것으로는 계절적으로 공급이 제한되므로 이후에는 대구 매천시장으로 다니면서 부족한 물건을 도매해서 팔고 있다. 그녀의 노점에는 집에서 농사지은 것과 도매시장으로부터 떼어 온 물건들이 섞여 있다. 때로는 남편이 물건을 떼다 주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녀가 도맡아 한다. 5일에 한 번씩 같이 장사를 하는 사람들과 짝을 지어 한 번에 두 명이 각각 4만 원씩을 내고 용달차 한 대를 세내어 물건을 해 온다. 김연화 씨의 노점에는 양파, 대파, 실파, 고추, 무, 배추, 양배추, 당근, 시금치, 연근, 상치, 깻잎, 고구마, 감자, 토란…… 등 가정의 식탁에 오르는 것은 모두 구비되어 있다.

김연화 씨는 연중 쉬는 날이 며칠 되지 않을 정도로 부지런히 노점을 연다. 겨울철에는 오전 9시나 9시 반쯤 나와서 오후 6시 반이나 7시쯤 마친다. 여름에는 8시쯤 그만둔다. 수은주가 영하를 밑도는 바람 부는 날씨에도 “인제 몸에 배인 거니까 견딜 만하다.”면서 노점을 끝까지 지킨다. “그래도 놀고 싶을 때나 혼사 집 갈 때는 논다.”고 말하자, 길 건너편에서 과일 노점상을 하는 같은 동네 최씨[남, 50대]는 “할매는 혼삿집 가더라도 장사하고 싶어 곧바로 나와요.”라면서 크게 웃는다.

[장사해서 집도 짓고 논도 사고]

김연화 씨가 30년 동안 장사를 하면서 느끼는 가장 큰 보람은 노력해서 번 돈으로 자녀 교육과 결혼까지 시키고 또 새 집을 짓고 농토도 늘린 일들이다. 결혼 후 분가하던 당시에는 논 한 뙤기 없었지만, 장사해서 번 돈으로 600평[1983.47㎡]의 논도 장만했다. 자녀가 집을 장만하는 데도 목돈을 보태 주었다. 자녀 공부와 결혼시킬 때 필요한 큰돈도 조합에서 빚을 내다 쓰고 장사해서 조금씩 갚아 나가곤 했다.

“그러니까 우리 노후 보낼 돈이 없지요. 노후 돈이 없으니 이렇게 나와 앉았지요.”라면서 활짝 웃는 그녀의 미소 속에는 대가야 보부상의 뚝심과 희망찬 미래가 엿보인다. 김연화 씨는 이제 자식들의 집 장만 걱정도 덜고, 지금부터는 노후 생활 자금도 조금씩 저축해 나갈 계획이다. 30년 동안 노점 거리를 지켜 온 대가야 보부상의 후예답게 오늘도 굳세게 땅을 딛는 그녀의 발걸음이 유난히도 단단해 보인다.

[정보제공]

  • •  김연화(여, 1947년생, 고령읍 연조리 주민, 채소 노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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