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4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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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濟州風土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문기 |
간행 시기/일시 | 1712년 - 「제주풍토기」가 수록된 『규창집』 초간본 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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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 시기/일시 | 1729년 - 「제주풍토기」가 수록된 『규창집』 중간본 간행 |
간행 시기/일시 | 1896년 - 「제주풍토기」가 수록된 『규창집』삼간본 간행 |
소장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산56-1 |
성격 | 풍토기 |
저자 | 이건 |
편자 | 이조 |
간행자 | 이조 |
[정의]
조선 후기의 종친(宗親) 이건(李健)이 제주 유배기간 중 기록한 풍토기.
[개설]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는 이건이 1628년부터 1635년까지 8년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제주도의 기후와 토지상태·풍습·생활상 등을 기록한 것이다.
이건은 선조의 손자인 인성군(仁城君) 공(珙)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자강(子强), 호는 규창(葵窓)이다. 1628년(인조 6) 아버지인 인성군이 진도로 귀양가서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아버지의 죄에 연좌되어 이건의 형제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8년 만에 양양으로 이배되었고 1637년 인조의 명으로 부직되어 풀려 나왔다. 시·서·화에 모두 뛰어 나서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졌다.
[편찬/간행 경위]
이건의 시문집인 『규창집(葵窓集)』은 이건의 막내아들인 화릉군(花陵君) 이조(李洮)에 의해 1712년 초간본, 1729년 중간본이 목활자로 간행되었다. 중간본은 초간본에 숙종의 어제어필(御製御筆)로 된 율시 1수와 1727년 김유경(金有慶)이 쓴 발문을 덧붙인 것이다.
5권 3책으로 간행된 초간본과 중간본이외에, 필사본 『규창유고(葵窓遺稿)』가 전한다. 12권 7책으로 된 『규창유고(葵窓遺稿)』는 자세한 전사(轉寫) 시기와 경위는 알 수 없는 괘인사본(罫印寫本)과, 이건의 8대손 이원응(李元應)이 1882년과 1869년에 각기 나누어 등초(謄抄)한 이원응사본(李元應寫本)이 있다.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는 초간본과 중간본에는 권5 잡저(雜著)에, 필사본에는 권11 기(記)에 수록되어 있다.
[서지적 상황]
초간본은 크기가 27.7×17.5㎝이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규 7297]에 소장되어 있다. 중간본 역시 서울대학교 규장각[규 7643]에 소장되어 있으며, 크기는 27.7×17.5㎝이다.
또 필사본 2종 가운데 간행시기를 알 수 없는『규창유고(葵窓遺稿)』는 국립중앙도서관[한45-가49]에 소장되어 있으며 『한국문집총간』 122권에 영인되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원응 필사본은 서울대 규장각[古 3428-51]에 소장되어 있으며 크기는 28.8×18.6㎝이다.
[구성/내용]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는 탐라(耽羅)[제주도]의 위치와 순풍을 만나 오는 방법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견디기 힘들었던 유배지 제주의 생활을 정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건이 기록한 제주의 모습은 기후, 민간신앙, 척박한 토지, 목자와 잠녀의 고된 역(役), 토산물과 동식물, 제주 삼성혈과 삼성신화, 헌마(獻馬)로 부총관(副摠管)에 오른 김만일에 대한 이야기 등에서 드러난다. 즉 구렁이와 뱀을 조상의 신령[府君神靈]으로 여겨 죽이지 않고, 화복(禍福)을 빌고 길흉(吉凶)을 점치는 신당(神堂)에 대한 기록에서 민간신앙의 일면을 보여준다.
또 제주민에 대한 관가의 침탈은 여름에 한라산 정상에서 얼음을 채취케 하고, 견디기 힘든 목자와 잠녀의 역(役)에 대한 기술에서 보인다. 대정현에 간혹 논이 있다고 하지만 토지가 매우 척박하여 쌀이 귀하고, 이를 대신하여 밭벼[山稻]를 심어도 경작에 어려움이 많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 귤의 종류와 진헌(進獻)의 실상, 물통을 등에 지고 나르고 여럿이 모여 구슬픈 노래를 부르며 방아를 찧는 섬 여인의 모습 등을 소개하고 있다.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에서 서귀포시 지역의 특색을 찾기는 어렵지만, 이건이 기록한 제주의 풍토는 정의현과 대정현에서도 보이는 공통된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제주도와 양양(襄陽)에 유배되었던 전말을 기록한 「제양일록(濟襄日錄」[유찬기(流竄記)]은 당시 서귀포시 지역에 대한 기록이 있어 도움이 된다. 「제양일록(濟襄日錄」에는 당시 정의현에 유배된 사람으로 한영(韓泳), 우필전(禹弼甸), 서신(徐兟)이 기록되어 있고, 1633년에는 존자사(尊者寺)에 올랐지만 한라산 정상은 보지 못한 아쉬움을 적고 있다. 같은 해 8월에는 산방(山房)을 들러 구경하고, 불교의 신앙심이 깊은 좌수 김진(金珍)을 만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는 17세기 초반 서귀포 지역의 풍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