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5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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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遷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문기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김성구(金聲九)가 정의 현감 재임 시의 일들을 일기체 형식으로 기록한 글.
[개설]
『남천록(南遷錄)』은 김성구[1641~1707]가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된 1679년(숙종 5) 3월 12일부터 정의 현감으로 좌천되었다가 1682년(숙종 8) 1월 16일 아버지가 임시로 사는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남긴 기록이다.
김성구는 정의 현감 재임 때의 일뿐만 아니라 최부의 『표해록』, 임제의 『남명소승』, 김정의 『제주풍토록』, 김상헌의 『남사록』, 『지지(地誌)』 등을 인용하여 제주의 풍토를 기록하고 있다.
[편찬/간행 경위]
『남천록』은 김성구의 문집인 『팔오헌문집』에 권5·권6에 상·하로 실려 있다. 『팔오헌문집』은 1873년(고종 10) 6대손 우수(禹銖) 등이 목판본으로 편집, 간행한 것으로, 외예(外裔) 권연하(權璉夏)의 발문에는 8권 4책이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7권 4책[元·亨·利·貞]이다.
권연하와 김우수의 발문에 의하면 『팔오헌문집』은 이미 김진동(金鎭東)이 간행한 『문소세고(聞韶世稿)』[1797]에 실려 있었다. 그런데 『문소세고』 권12~17에 실려 있는 『팔오헌문집』이 간략한데다가, 배향한 사우(祠宇)마저 서원 철폐령[1868]으로 훼철되어 그 흔적이 없어질까 두려워 시문(詩文)·장주(章奏)·경연일기(經筵記事)·영해일록(瀛海日錄) 등을 덧붙여 간행한 것이다. 『남천록』은 이때 수록된 것으로 추측된다.
[서지적 상황]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의 형태 사항에 따르면,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은 20.1×14.8cm이고, 크기는 30.5×19.7cm이다. 김성구의 시문집인 『팔오헌선생문집』에도 수록되어 있다.
[구성/내용]
『남천록』의 내용은 부임하던 1679년(숙종 5), 한라산신제를 지내고 둔마를 점검하던 1680년, 제주도를 떠나던 1681년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서귀포시 지역과 관련된 내용은 제주목에서 정의현으로 떠나던 1679년 7월 21일부터 1681년 10월 15일 신임 현감에게 사무 인계를 할 때까지의 기록에서 보인다.
1679년 정의현으로 가며 제주의 풍토와 정의현의 모습을 적고 있는데, 주로 산천·정의현성의 규모·토지 상태·인물에 대한 것이다.
김성구가 기록한 토지 상태는 매우 척박하여 2~3년을 연이어 경작할 수 없는 정도였고, 양전안(量田案)과 어린책(魚鱗冊)이 없어 육지의 화전제(火田制)와 같다고 하였다. 아울러 밭에 동·서 경계 표시가 없고 자호(字號)와 결수(結數), 그리고 밭이름[員名]도 명백하지 않아 소송이 매우 많다고 하였다. 8월 6일에는 제주 목사 최관에게 읍폐를 보고하였는데, 관아 건물들의 퇴락과 과중한 포작인의 역, 그리고 가뭄으로 인한 진상과 산마구점(山馬驅點)의 어려움에 대한 것이었다.
9월 10일과 11일에는 서귀창에서 환곡을 나누어 주고, 의귀원(衣貴院)에서 점심을 먹고 관아에 돌아왔다. 김성구는 관아에서 의귀까지 30리이고, 의귀에서 서귀까지 40리라 하여 ‘서귀포 칠십리’의 연원을 추측할 수 있다.
1680년 3월에 한라산신제 제관(祭官)으로 뽑혀 한라산신제를 지내고 존자암·영실동(瀛室洞)·오백장군동(五百將軍洞)을 구경하였다.
1618년에는 삼매양[삼매봉] 봉수 아래 표류한 대마도 사람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