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5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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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旌義縣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임승희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1리 일대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성곽.
[건립 경위]
1416년(태종 16년) 5월 6일에 제주도 안무사 오식(吳湜)과 전 판관 장합(張合) 등이 제주를 삼읍으로 나눌 것을 건의하여 정의현을 두었다. 정의현이 설치될 당시의 정의현성은 지금의 위치가 아닌, 성산읍 고성리에 위치하였다. 사실 정의현성의 위치는 애초부터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읍성은 그 고을의 중간적 지점에 위치해야 주민들이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의현성은 정의현의 동쪽지역에 너무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의현성은 땅이 우도(牛島)에 가까워서 새벽과 밤에 고각(鼓角) 소리가 들리고 여러번 큰 바람이 불어 흉년들었을 뿐만 아니라 왜적이 번갈아 침범하는 위험이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정의현성은 설치 초기부터 이설해야 된다는 여론이 제기되었고, 정의현성의 이설 후보지로는 토산․진사[현 표선면 성읍리]․서촌리 등이 대상이 되었으나, 1422년(세종 4) 12월에 진사리(晉舍里)[지금의 성읍1리]로 결정되었다. 이에 도안무사 정간(鄭幹)은 제주판관 최치렴(崔致廉)을 책임 감독관으로 삼아 1423년 1월 9일부터 1월 13일까지 불과 5일만에 제주도 전체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새로운 정의현성을 완성하였다. 정의현성은 식수로 사용하는 물을 쉽게 얻을 수 없다는 이유로 토산리나 영천관으로 이설하는 문제가 논의되었으나,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위치]
정의현성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 1리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데, 정의현 설치 당시 정의현성[고정의현성 터]은 현 성산읍 고성리에 있다.
[형태]
정의현성은 둘레가 2,520척[763.56m]이고 높이는 13척[3.939m]이었으며, 동․서․남 3문 외에 여첩(女堞) 180개가 있었다. 이후 성은 2,986척[904.758m]으로 확대 되었다. 각 시기별 문헌사료에 나타나는 정의현성 규모의 변화과정은 다음과 같다.
〈표〉GC04600594_01_정의현성 규모의 변화과정
정의현성에는 생수(生水)가 솟아나는 곳이 없었으므로 빗물을 담아두는 우물을 2곳에 마련하였다. 또한 이 우물이 고갈되었을 때에는 성의 남쪽으로 2리 정도 떨어진 대천수[천미천]을 이용하였다.
관아시설로는 객사를 기본 축으로 하여 동쪽에 군기고․사창, 북쪽에 현감의 집무처인 일관헌과 감옥․작청, 서쪽에 무학청․출신청․가솔청․향교, 서남쪽에 향청․평역고 등의 시설이 배치되어 있었다.
1653년에 편찬된 이원진의 『탐라지』에 따르면 정의현에 소속한 병력은 파총 1명, 성장 2명, 초관 7명, 마병 260명, 성정군 591명, 속오군 390명, 봉·연군 60명, 봉족군 60명이었다고 한다.
[현황]
정의현의 읍성 복원·보수는 198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86년 북쪽 성벽에서 남서쪽 382m, 1987년 남문지에서 동문지 간 250.8m, 1988년 동문지에서 북쪽 도로와 만나는 부분 231.1m, 1989년 남쪽 유실의 나머지 부분 151.2m 정도 등이 1994년까지 복원·보수되었고, 그 이후에도 조선 시대 당시 축조된 성벽이 훼손되자 2010년 2월까지 나머지 훼손된 일부를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특히 정의현감이 업무를 보던 일관헌은 1975년 옛 건물을 헐어내고 새롭게 증축돼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성읍민속마을 주변에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현청 등을 보호하는 성도 복원되었다.
[의의와 평가]
현재 정의현성이 위치했던 성읍리는 1984년 6월 7일 국가중요민속자료 제18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관헌은 1975년 3월 12일 지방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성산읍 고성리에 있는 본래의 정의현성[고정의현성 터]은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 실정인데 최근 이 일대의 개발로 유적의 훼손이 심히 우려되고 있어 보존이 매우 시급한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