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6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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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西歸鎭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동 717-4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임승희 |
건립 시기/일시 | 1439년 - 서귀진 성 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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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590년 - 서귀진 서귀포구 이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0년 - 서귀진지 서귀포시에서 부지 매입, 복원 추진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0년 11월 1일 - 서귀진지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55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서귀진지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재지정 |
소재지 | 서귀진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동 717-4번지 외 59필지 |
성격 | 진지[터] |
문화재 지정 번호 |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동 에 있던 조선 시대 방어시설인 서귀진 터.
[개설]
진은 변방의 방어를 위하여 북변과 해안지대에 구축된 군사행정구역으로서, 조선 시대에 와서 왜구의 방어를 위하여 남방 연변에 많이 설치되었다. 조선 시대 제주도에서는 방호소 또는 진으로 불렸다. 조선 후기에는 9진으로 정착되었고 모든 진에 성이 축조되었는데 9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서귀진이었다.
[변천]
서귀진 자리에는 조선 초기부터 방호소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해변가 홍로천 위였다. 1439년(세종 21) 한승순 제주목사가 잦은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성을 쌓았다. 성종 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에는 “서귀성은 석축으로 주위가 161척[48m], 높이 5척[1.5m]”이라 기록되어 있다.
1590년(선조 23) 이옥 목사가 서귀진 자리를 서귀포구 동쪽으로 옮겼는데 이때 진성의 규모는 주위 251m, 높이 3.6m에 이르렀다고 한다. 서문과 남문이 있었고, 성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성 밑으로부터 구멍을 파서 물을 끌어왔다고 한다.
성 밑 포구가 넓고 암벽으로 되어 있어 자연 방풍이 되므로 수백 척의 선박을 감추어 둘 수 있었다. 그러나 서귀진 주변에 사람이 살지 않았으므로, 폐지된 목장을 백성에게 나누어주고 진 주위에 살도록 했으며 정방연 상류의 물을 끌어와 식수와 농사에 이용하였다.
[위치]
서귀진지의 현재 위치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동 717-4번지 외 59필지에 해당한다.
[현황]
서귀진지는 일제 강점기에는 기와 건물 3동과 성담이 남아 있어 일본군이 활용하였다고 한다. 4·3 사건이 일어나자 서귀진성의 성담을 헐어 마을방어용으로 축성하고, 이후에는 집의 울타리나 밭담으로 활용되면서 대부분 훼손되어 버렸다. 서귀진지에는 남제주군 교육청, 서귀여자중학교가 있었으나 1965년 이후 사유지로 불하되어 제일교회 등이 들어섰다. 서귀진지는 2000년 제주도 기념물로 지정된 뒤 서귀포시가 부지를 매입해 복원을 추진하고 있고, 2000년 11월 1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