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7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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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辛酉義塾-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웅철 |
소재지 | 신유의숙 터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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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항일교육|학교 터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김성숙(金成淑)이 설립한 학교 터.
[개설]
일제 강점기에 3·1 운동으로 6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경성고보에서 퇴학을 당한 회을 김성숙이 귀향하여 민족혼을 일깨우며 교육을 통해 나라를 되찾고자 세운 학교가 신유의숙이다.
김성숙은 이곳에서 ‘1리 1학교 1청년회’세우기, ‘한글을 통해 문맹 퇴치하기’, ‘무궁화 정신함양’과 ‘나라사랑, 겨레사랑’운동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일제강점기에 초등교육을 행하던 학교] 과정을 도입하는 특유의 교육관으로 항일교육과 한글 보급을 통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야학을 지속, 가파도를 문맹자 없는 섬으로 만들었다.
학교 모표를 무궁화로 도안하였다 하여 사상 유래 없는 초등학교 폐교까지 당했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고 오늘의 가파초등학교로 90년을 이어온 학교의 터가 바로 신유의숙 터이다.
[변천]
을사늑약에 이은 경술국치로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무수한 반일인사들의 활동이 여러 방법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1919년 3월1일 독립만세운동 때, 김성숙은 경성고보 기숙사 생도들을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에 참여시키고, 모리[森爲三] 사감을 감쪽같이 속이며 3월 5일 시위까지 선도적으로 참여했던 활동이 드러나, 종로경찰서 고등계에 체포되어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퇴학생이 되어 귀향한 김성숙은 형님 댁 대청마루에서 성문의숙를 열었고, 대정보통학교 모슬포분교도 계획하였지만, 보다 큰 뜻을 가지고 향리인 가파도에 입도(入島)하였다.
마을의 중심인 가파도 355번지에 터를 잡고 1921년 최남단 가파도에 항일독립심 고취, 한글로 문맹을 퇴치하는 새로운 내 나라 되찾기, 농어업을 다시 활발히 일으켜 힘을 기르고, 한 마을 한 학교 한 청년회를 만들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며 주민의 정성어린 협조를 얻어 피와 땀으로 학교를 세우고, 혹독한 일제의 교육탄압정책을 이겨내었다. 사립학교로서 비록 소규모의 의숙이었지만, 이 나라 최초로 6년 과정의 심상소학교 과정을 개설 운영하였다.
그 당시로는 생각도 못할 숙가[교가]를 제정함은 물론, 무궁화꽃 문양으로 의숙의 교표[모표]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부착시키니, 이로 인해 초등교육기관의 폐쇄라는 사상유래 없는 혹독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끈질기게 세운 민족학교가 바로 신유의숙이다.
신유의숙은 가파도의 문화, 교육과 마을공동체로 소통의 중심지였고, 한글사랑의 실천은 당찬 항일의지의 실천이었지만 눈물겨운 생활고를 이겨내면서 호롱불 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모포 따위로 창문을 막고 졸음을 참아내면서 야학공부를 통해 문맹자 없는 가파섬으로 만들었다.
이에 더하여 항일독립의지 실천과 출향한 해녀, 근로자들의 애향 실천이 자립의지를 키우는 학교에서 배우는 ‘직업’시간과 산학협동체제가 되어 가파도 전 주민의 소득을 키우는 모태가 되게 했고, 제주도 본섬에서 제주면의 강승훈 등이 청강유학을 올 정도로 민족학교, 항일학교로 일취월장하게 되었다.
일본의 나라꽃은 벚꽃으로, 이를 각종 로고에 응용했는데, 김성숙의 신유의숙은 숙가[교가]에도 무궁화가 나오고, 더욱이 우리 꽃 무궁화를 바탕으로 의숙의 교표를 제정, 도안했다. 이를 패용하고 다닌 것이 일제에게 극력 항거하는 것으로 판단된 일제에 의해 인류 역사사상 유래 없는 초등교육기관인 신유의숙[학교]이 1년간 폐쇄명령을 받게 되었다. 최후까지 일치단결한 가파도 주민들은 때로는 항일인사들이 공해상으로 탈출하는 경유지를 마련해주기도 하며 끝까지 학교를 지켜내었다.
원래 신유의숙의 터는 가파도 상동부락에 위치했었으나, 마을 중심이어야 하겠기에 샘물이 솟는 섬 중앙으로 옮겨 새 학교건물을 다시 짓고, 큰 포부로 민족혼을 심는 교육을 이어갔다.
주민들의 단성으로 모아진 학교건립성금은 모두 800엔(円) 이었으나 가파리 275번지 421평 대지 위에 건축비 900엔(円)을 들여 24평짜리 교사(校舍)를 건축하였다. 신유의숙이 훗날 학교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총건축비 1,000엔(円)을 들여 1935년에 30평짜리 교사를 지어 운영했다.
나라 안 어느 누구도 상상도 못할 초 미니학교에서 교가에 해당하는 숙가를 짓고, 대도회지의 학교에도 없었던 학교상징 교표를 서슬 퍼런 일제하에서 일제의 상징 벚꽃을 완전히 배제하고 나라꽃 무궁화를 바탕으로 도안하여 그 안에 ‘신유’라는 학교명을 집어넣고 학생들 모두가 당당히 패용했던 실로 자랑스러운 학교였다.
섬마을의 산업, 교육, 문화와 소통의 중심이 되어 야간이면 문맹퇴치를 위해 한글공부를 시켜가며, 더욱이 제주 본섬에서도 엄두를 못낸 심상소학교 과정을 탄탄히 다져주어 본섬 안에서도 많은 청강생들이 유학 행렬을 이어나갔다.
주변 바다가 온통 황금어장이어서 신유의숙의 모든 학생들과 마을사람들이 주경야독하는 자립의지와 탐구정신은 눈물겨운 노력으로 단 한명의 문맹인도 없는 위대한 섬마을을 만들었다.
그 만큼 김성숙의 교육은 계획에서 추진까지 한 치의 차질도 없이 이루어져나갔는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학교 교표가 무궁화인 것이 초등학교 교육기관인 신유의숙 폐교라는 사상 유래 없는 민족교육말살정책에 1년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회을 선생에게서 배우고 익힌 끈질긴 섬사람들의 투혼은 야간에도 모포로 창문을 가려 불빛이 새나가는 것을 차단하며 호롱불 밑에서 면학 정진하고, 꾸준히 토론학습을 지속하여 이후 일본 등지에서 우리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들을 여럿 배출했다.
교장[숙장]이 더 큰 꿈을 가지고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대학정경학부에서 교장출신 만학도가 된 뒤에 재일전조선유학생회장으로, 신간회 선전부의 책임자로, 나아가 협동조합운동사를 창립하여 우리 동포들의 권익보호에 앞장서 크게 활약하는 데도 신유의숙 출신들의 눈물어린 격려의 글월들이 종종 답지해서 민족항일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했다.
[현황]
학교를 열 때 이도일을 비롯한 향리 주민들이나, 고수선·오대진·김한정·이신호 같은 대정소학교 동문, 항일동지들의 피와 땀이 서린 신유의숙 터에는 오늘날 가파초등학교가 옛 명성을 되찾으려고 꿈을 키워나가는 10명 남짓의 초등학생들이 항일애국의 선각이며, 가파도의 위상을 온 나라 안에 높여준 선생의 덕을 기려 경비 일체를 마을사람들과 신유의숙 출신들이 단성을 모아 세운 회을 김성숙의 동상 옆에서 방과 후 교육활동까지 하며 내일을 기대하는 참교육의 산실이다.
[의의와 평가]
가파도 명물 청보리밭과 함께 걷는 관광의 대명사가 된 올레길과 함께 길이 후세들에게 넘겨주어야 할 유서 깊은 배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