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7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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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入島祖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집필자 | 김동전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 지역에 다른 지역에서 제주도에 들어와서 정착한 최초의 동일 성씨 선조.
[개설]
제주의 경우 토착 성씨인 고씨·부씨·양씨 3씨(三氏) 성을 제외하면 모두 다른 지역에서 들어와 정착한 성씨들이다. 이들이 어떠한 이유로 제주에 들어와 정착했든 그 후손들은 제주에 최초로 정착한 선조를 입도조라 칭하였다.
[내용]
입도조란 바로 수령이 파견되던 섬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제주도 외에도 진도나 완도 등에도 입도조가 존재한다.
제주의 토착성 씨인 고씨·부씨·양씨를 제외하면, 제주의 성씨는 모두 다른 지역에서 건너온 성씨들이다. 이들이 어떠한 이유로 제주에 들어와 정착했든, 그 후손들은 제주에 최초로 정착한 선조를 입도조라 칭하였다.
제주 입도조 가운데는 유배된 사람들이 많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조선 개국에 반대했던 두문동 72인 가운데 제주도에 유배된 한천(韓천)은 가시리, 김만희(金萬希)는 곽지리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후일 각각 청주 한씨, 김해 김씨 좌정승공파의 입도조가 된다.
이를 전후해 이미(李美)·변세청(邊世淸)·허손(許遜) 등도 조선 개국에 반대한 이유로 제주에 유배되었는데, 각기 경주 이씨 익제공파, 원주 변씨, 양천 허씨 입도조가 되었다. 제주에 유배되었던 한천·김만희·이미를 지칭해 제주에서는 끝내 충절을 지킨 사람들이란 의미에서 삼절신(三節臣)이라 부르기도 한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은 신덕왕후와 사촌지간으로 전라 감사에 있던 강영은 1402년 제주도 함덕에 유배되었고 신천 강씨도 입도조가 되었다.
고부 이씨 입도조인 이세번은 조광조의 무죄를 호소하다가 조선 중종 17년(1522)에 대정현 신도리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7년간의 유배 생활 끝에 병을 얻어 제주에서 사망하자, 병 간호를 위해 제주에 왔던 가족들은 제주에 정착하여 고부 이씨 입도조가 되었다. 인목대비의 폐모를 반대하다가 제주에 유배된 이익(李翼)은 제주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고홍진·김진용·문영준 등 제자를 길러내어 제주 교육 발전에 막대한 역할을 행하였다. 그는 제주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경주 이씨 국당공파의 입도조가 되었다.
광해군 때 제주에 유배된 김응주(金膺珠)는 제주에서 소실을 맞아 자손을 낳고 유배에서 풀리자 되돌아가는데, 그의 아들은 제주에 남아 김해 김씨 사군파의 입도조가 되었다. 당시 김응주는 제주 목사 김여수와 친척이었으므로 유배 생활 중에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제주에 유배된 박승조(朴承祖)는 아들 박자호를 데리고 제주도 곽지리에 정착하여 유배 생활을 하다가 유배가 풀리자 본인만 돌아갔다. 따라서 그의 아들은 제주에 뿌리를 내려 밀양 박씨 규정공파의 입도조가 되었다.
왕족이었던 회은군 이덕인(李德仁)은 당시 심기원 등이 인조를 거부하고 회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데 당사자로 연루되어 1644년(인조 22)에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1645년에 서울로 압송되어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일찍이 그의 서자 이팽형(李彭馨)이 현실 정치에 회의를 느끼고 제주에 들어와 은둔 생활을 하다가 아들을 낳아 전주 이씨 계성군파의 입도조가 되었다.
현종 때 제주에 유배된 이지달(李枝達)은 서인과 남인의 예송 논쟁에 연루되어 대정현에 유배되었는데, 그는 제주에서 소실을 얻어 아들 이보운을 낳았다. 유배에서 풀리자 그는 아들을 남기고 본인만 올라가게 되면서 수안 이씨의 입도조가 되었다. 숙종 때 기사환국으로 제주에 유배된 김예보는 유배에서 풀렸지만 돌아가지 않고, 제주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여 김해 김씨 회의공 김경서파의 입도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