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7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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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山金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강만익 |
[정의]
신라 신무왕(神武王)의 왕자 김흥광(金興光)을 시조로 하고 김윤조(金胤祖)를 제주 입도조(入島祖)로 하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에 세거하는 성씨.
[연원]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전라남도 광산은 광주의 별칭이며, 이곳의 토착 성씨는 탁(卓)·이(李)·김(金)·채(蔡)·노(盧)·장(張)·정(鄭)·박(朴)·진(陳)·허(許)·번(藩)·성(成)·승(承) 등 13 성씨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타난 김씨 성은 광산을 본관으로 광산김씨의 연원을 이루며 신무왕의 왕자 김흥광이 전라도 광산현, 무진군 서일동 곧 평장동에 정착하면서 비롯된다.
이 가문의 중흥의 역사를 이룬 것은 10세손 김대(金帶)부터로, 이때부터 번창하여, 고려의 중신들을 대거 배출하게 된다. 그에게 위(位)[상서령], 주영(珠永)[중랑장] 두 아들이 있었다. 장자 김위는 광세(光世)[중랑장]부터 종량(鍾亮)[대장군]으로 인맥을 이었고, 김종량이 수(須)[문과 급제, 감찰어사]와 주정(周鼎)[평장사, 문숙공] 두 아들을 두었다. 광산김씨가 제주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이 시기이다. 김수는 삼별초의 난 때 관군의 부장으로 제주도에 건너왔다가 순절하였다.
김수는 태일(台一)과 태현(台鉉)으로 인맥을 이룬다. 광산김씨의 확고한 기반을 굳힌 이는 김태현(金台鉉)이다. 제주에 사는 광산김씨는 대부분이 김흥광의 15세손 문정공 김태현의 후예들이다. 학문과 지절이 높아 명신으로 이름난 김태현은 슬하에 4남을 두었는데, 3남 문간공 김광재(金光載)의 차자가 김윤조(金胤祖)로서 광산김씨 제주도 입도조가 된다.
[입향 경위]
고려 공민왕 14년(1364) 신돈이 정권을 탈취하자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고 망국의 징조가 일기 시작하여 뜻있는 충신들이 궐기의 기회를 엿보던 중 군기감으로 있는 친형 김흥조(金興祖)가 김정·조사공 등과 함께 신돈을 제거하려다 모의가 탄로나 해를 입었다. 이에 멸문지화를 면하고 고려 조정에서는 더 볼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구좌 김녕리에 기착하여 새로운 생활 터전을 잡았다.
구좌 김녕리에 기착하여 새로운 생활 터전을 잡은 김윤조(金胤祖)는 훈학에 힘쓰는 한편 예의와 효도를 숭상하여 덕이 높았다. 제주의 광산김씨 가문은 시조의 20세손이며 김윤조의 증손인 김계충(金繼忠) 대에 이르러 번성의 기회가 마련된다. 김계충은 슬하에 귀림(貴林)·귀천(貴泉)·귀문(貴文)·귀손(貴孫) 형제를 두었다. 특히 귀천의 3남 세응(世應)의 손자인 경봉(景鳳) 대에 이르러 향현(鄕賢) 김진용(金晉鎔)[일명 명도암 선생]이 둘째 아들로 탄생한다. 김진용은 인조조에 벼슬을 제수하여도 나아가지 아니한 당시 석학 이익(李瀷)의 문인으로 천성이 온화하고 도학(道學)을 숭상한 학자였다.
[현황]
2000년 11월 현재 제주도에 6,653가구에 21,614명이 거주하고 있다. 서귀포시 지역에는 2,219가구에 6,792명이 살고 있다. 구좌읍 김녕리 3593-2 속칭 고산뫼(花山岳)에 있는 김윤조(金胤祖)의 묘는 고려 양식인 석곽방묘의 묘형이며, 후손들이 음력 3월 15일 시제를 봉행하고 있다. 삼별초의 난 때 관군의 부장으로 제주도에 건너왔다가 순절한 김수(金須)의 묘는 애월읍 고성리 산 124번지[속칭 삼심악 중턱]에 있어 후손들이 계속 관리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