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818 |
---|---|
한자 | 康聖翊 |
이칭/별칭 | 오응(五應),명재(明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규복 |
출생 시기/일시 | 1747년 - 강성익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781년 - 강성익 제주 시재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783년 - 강성익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83년 - 강성익 승문원 겸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94년 - 강성익 이조 정랑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819년 - 강성익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3년 - 헌수단 정비 및 헌수각 건립 |
출생지 | 강성익 출생지 -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 |
수학지 | 강성익 수학지 - 제주시 오라동 |
수학지 | 강성익 수학지 - 제주시 도련동 |
부임|활동지 | 강성익 사천현감으로 부임 - 경상남도 사천시 |
부임|활동지 | 강성익 비안현감으로 부임 - 경상북도 의성군 |
부임|활동지 | 헌수단(獻壽壇) -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위도: N33°22´11.2935˝ 경도: E126°51´11.1144˝] |
기념비 | 헌수각(獻壽閣) -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위도: N33°22´11.2935˝ 경도: E126°51´11.1144˝]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신천(信川) |
대표 관직 | 승문원 검교, 이조정랑, 사헌부 장령 |
[정의]
조선후기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신천(信川). 자는 오응(五應), 호는 명재(明齋)이다. 1747년(영조 23) 성산읍 삼달리(三達里)의 입촌(入村) 시조인 강일명(康一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는 강문달(康文達), 증조부는 강사안(康嗣安)이며, 외조부는 김무홍(金武弘)이다.
[활동 사항]
강성익은 처음 오봉조(吳鳳祚)에게 학문을 배우고, 후에는 변성우(邊聖遇)의 문하생이 되었다. 1781년(정조 5)에 내도한 제주순무안사시재어사(濟州巡撫按査試才御史) 박천형(朴天衡)이 시취한 시재(試才)에서 김용(金墉), 변경우(邊景祐)와 함께 합격하였다. 1783년(정조 7)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승문원 검교(檢校)가 되었다. 이후 병조정랑(兵曹正郞)·이조정랑(吏曹正郞), 사간원 정언 및 사천현감, 비안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사헌부 지평 시절인 1800년(정조 24) 강성익은 국왕 정조에게 제주의 민폐에 대한 상소문(上訴文)을 올렸다. 상소문의 내용은 흉년에 대비한 곡물보관과 저장법의 철저한 관리, 국둔마(國鈍馬) 상납의 감면과 마정(馬政)관리에 대한 것이다. 정조는 이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를 사헌부 장령으로 임명하여 그 일을 직접 처리하게 함으로써 강성익은 제주도민의 칭송을 받게 되었다.
강성익은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뒤에도 정조의 성은(聖恩)을 기리고자 마을 모퉁이에 단(壇)을 조성하고 밤낮으로 북향배(北向拜)를 하면서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현재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에는 당시 그가 세운 헌수단(獻壽壇)이 남아 있으며, 단의 비석에는 '성은여천 도보무지 근이설단 월헌만수(聖恩如天圖報無地謹以設壇月獻萬壽)'라 비문이 새겨져있다.
[상훈과 추모]
후손들은 1983년 조상의 뜻을 기리고자 헌수단을 새로이 정리하고 헌수각이라는 비각을 세웠다. 비각 내에는 헌수비(獻壽碑)를 비롯하여 삼달리 명칭의 유래와 강성익이 올린 상소문, 강성익의 문과 급제 사실을 적은 실록의 원문을 그대로 대리석에 새겨 세워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