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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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子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임승희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지역에서 전통 시대에 부모를 효성으로 극진하게 섬긴 자녀.
[개설]
효자란 자신의 부모에게 아들의 의무를 다한 사람을 일컫는다. 결혼한 여성의 경우 남편과 시부모를 위해 희생했던 반면에, 남편은 아내와 자식을 위해 희생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이는 가부장제 사회의 전형으로 아들이 없는 경우, 효부와 효자가 없어서 대접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혈육에서 양자를 취했던 기록들이 남아 있다.
서귀포 지역의 효자·효부·효녀에 대한 기록은 관찬·사찬·읍지류의 사료와 구비자료, 각 마을마다 세워진 효행비 등을 통해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대표적인 사료로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제38권],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속탐라록(續耽羅錄)』, 『박씨삼정문록(朴氏三旌門錄)』, 『효열록(孝烈錄)』,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 『제주목 지지총람(濟州牧 地誌總攬)』, 『속수삼강록(續修三綱錄)』 등에 효자·열녀·효부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서귀포 지역 효자의 유형]
여성들은 순절, 수절, 효부로 가문의 이름을 부여받는 반면에 아들들은 부모의 의식주 해결 등 온갖 방법으로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 드리고, 아프면 배변으로 병세를 확인하고, 손가락을 잘라서 수혈하는 등 성심을 다해 병간호를 했다. 이후 돌아가시면 상장례를 철저히 준수하고 여막을 지어서 묘지를 관리하고 3년상과 제례에도 의무를 다했다.
이처럼 효자란 자신의 부모에게 아들로서의 의무를 모두 행한 사람을, 효행이란 부모 생전에 봉양함은 물론 돌아가신 후 제사를 잘 받드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효자들의 효행은 제주서귀포 지역에서도 각 유형별로 잘 나타나고 있다. 이에 각 유형별 효자 몇 명의 행적을 통하여 당시의 효행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부모 봉양 유형
예로부터 사람들은 어려운 가정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맛있는 음식을 구해서 어버이를 즐겁게 해 드리고, 날마다 안위를 살피는 것을 최고의 효도로 여겼다.
임재발은 대정에 살았으며,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는 예를 다했다. 1822년(순조 22년)에 암행어사가 아뢰어 복호(復戶)되었다.
강세억은 강윤인의 아들로 정의현 수산리에 살았으며,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예법에 어긋남이 없었다. 성장해서 할머니와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산에 가서 땔감을 구하여 와 항상 따뜻하게 해드리고 바다에 가서 고기를 잡아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했다. 그의 효성을 높이 사서 1822년(순조 22년)에 암행어사가 그 집에 정표하였다.
고명학은 서귀포효돈 출신이며 집이 가난하였으나 책 읽기를 좋아하고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였다. 1794년(정조 18) 26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고 보안현(保安縣)의 현승(縣丞:縣監)으로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버이가 늙었다 하여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스스로 밭을 갈고 사냥하며 맛있는 음식으로 공양하였다. 1814년(순조 14년)에 어사가 이 사실을 아뢰자 수령(首領)을 제수하였으나 어버이가 늙었다 하여 취임하지 않았다. 대정현감을 제수하여 어버이를 편히 모시도록 하였으나 친상(親喪) 중이라 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고재문은 정의현에 살았으며, 성품이 유순하여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나아가 어려운 백성을 보면 애휼하여 흉년을 당하면 육지에서 쌀을 사다가 나누어 주니 사람들이 효와 의가 겸전(兼全)한 이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착한 행실을 묵혀둘 수 없다 하여 마을에서 천거하였다.
강수철은 정의현에 살았는데, 천성이 효성스러웠다. 일찍 부모를 여의니 가슴을 치며 통곡하다가 기절하였다. 소생한 후에 늙은 할아버지를 봉양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할아버지가 임종하게 되자 음식을 전폐하고 할아버지를 따라 죽고자 하니 부인 오씨가 옛 사람의 거상지도(居喪之道)를 말하여 위로하고 마음을 돌리게 하여 초종상제(初終喪祭)를 잘 수행하게 했다. 마을 사람들이 관에 천거하니 완문이 내렸다.
김필환은 김종집의 아들로 정의현에 살았다. 천성이 착하고 지극 정성으로 어버이를 섬겼다. 율신제가(律身齊家)하니 모두 공자나 맹자 같다고 칭찬하였다. 자효지심(慈孝之心)으로 마을의 가난함을 주혈(賙血)하니 모두 감복하여 천거하자 완문이 내렸다.
2) 부모 병간호 유형
부모가 중병에 걸리면 효자들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부모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단지수혈을 하거나, 제철이 아닌 특별한 음식을 구해서 드리기도 하였다.
이교신은 대정에 살았는데 어버이를 섬기는데 있어 지효(至孝)하여 정성지절(定省之節)과 감지지공(甘旨之供)을 다했다. 어버이가 병이 나자 약이(藥餌)를 쓰지 않은 것이 없었다. 1822년(순조 22년)에 암행어사가 아뢰어 복호되었다.
양종인은 정의현수산사람으로 13세에 부모님이 전염병으로 사망하게 되자 곁에 있다가 단지(斷指) 수혈하여 아버지를 소생시켰다. 사람들이 천거하니 어린 아이로 뛰어난 행위를 가상히 여겨 목사 한응호가 포상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후에 삼성사재(三姓祠齋) 장의가 되고 복호되었다.
현능락은 정의에 살았는데 천성이 지효(至孝)했다. 할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 없었으며 할아버지가 병으로 위급하게 되자 손가락을 깨물어 수혈하니 얼마동안 목숨이 연장되었다. 그의 효행은 하늘이 내린 효자라 칭송하여 마을 사람들이 천거하니 완문이 내렸다.
홍봉호는 정의현에 살았는데 부인 김씨도 효부였다.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양친을 모시는 데 온정지절(溫情之節)과 감지지공(甘旨之供)에 정성을 다하였고, 그의 아내 역시 부도(婦道)를 다하여 시부모를 섬겼다. 아내는 시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고 시아버지가 병으로 누어서 똥오줌을 치웠는데 조금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고 오랫동안 약시중을 들었다. 마을사람들이 천거하니 완문이 내렸다.
[서귀포를 빛낸 효성]
1. 서귀포(구 남제주군) 대정읍에서 배출한 효자
1) 대정읍
남평 문씨인 문달민은 언행이 바르고 어버이를 섬기기에 정성을 다하여 맛좋은 음식을 드리고, 철종 2년(1851) 11월에 아버지가 위독하자 지혈(指血)로 죽음에서 소생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효성으로, 제주목사에 의하여 정표되었다.
문달복은 문달민과 사촌지간으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다가 병이 나서 위급하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마침내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철종의 국상을 당하자 자진하여 바다를 건너 도감청(都監聽)에 토역(土役)할 것을 호소하니 나라를 위한 충민(忠民)임을 찬양하였다. 이에 제주 목사가 이를 가상히 여겨 복호하였다. 1938년에 건립되어 1978년에 개건한 효자문달복 효자문달민지려비가 현재 대정읍 무릉 2리 인향동 산 63번지[농공단지 입구 삼거리 도로변]에 소재하고 있다.
강인홍은 본관은 진주이며 강영득의 아들로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에 의탁하여 살았다. 자라서는 고양홍의 딸에게 장가 들어 내외가 같이 할아버지를 봉양함에 정성을 다하였다. 이에 1963년 대정읍 영락리 1339번지[영락리 하동, 진동산 도로변 우측]에 효자강인홍비를 건립하여 강인홍의 효행을 기리고 있다.
박창진은 밀양 박씨이며, 가선대부 박봉철의 손자이고 향교 직원 박영상의 아들이다. 중년의 나이에 박창진의 아버지가 기이한 병에 걸렸는데 항상 떨어지지 않고 뜬 눈으로 간호했으며,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6년을 더 모시다가 끝내 돌아가시자 슬퍼함이 실성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제사를 예법에 따라 모시고 여막을 지어 3년을 살았으며 삭망이 지나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초하루와 보름에는 항상 산소를 찾았는데, 비와 눈이 온 후에는 청소를 하고, 탈복한 후에도 제삿날에는 목욕재계하여 초상때와 다름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에 그를 찬양하여 비각을 세우고, 이름을 전하기 위해 1920년 완문을 써주었다. 1956년에 건립하고, 1987년에 개건한 효자박창진문이 현재 서귀포시 대정읍 구억리구억분교 맞은 편 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2) 안덕면
현재옥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였으나 천성이 어질고 행실이 착하여, 집이 가난하여 끼니도 때때로 건너야 되는 어려운 지경에서도 부모 모시기를 정성을 다하였다. 품팔이로 쌀이나 고기를 얻게 되면 반드시 부모님의 구미에 맞게 하여 음식을 드렸고 부모의 상(喪)을 당하자 장례와 제사를 예로써 극진히 하였으므로 마을에서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를 보고 목사가 감동하여 완문을 주고 통감부에서 은전(恩典)을 내렸다. 서귀포시 안덕면 덕수리 235-3번지에는 1922년에 건립된 효자현재옥문이 위치하고 있다.
3) 표선면
강운은 본관은 신천(信川), 아버지는 강시한이고 어머니는 열녀 송천향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어머니를 섬기는데 아버지와 같이 했으며 어머니가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시자 아버지 묘에 합장하고 그 곁에 여막을 지어 아버지를 위하여 삼년상을 추복(追服)하였다. 1780년(정조 4년)에 정표되어 1907년 전력부위강효자정려비가 건립되었는데, 1971년에 재건하였다. 현재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1024번지성읍초등학교 입구 도로변에 강효자의 행적이 적힌 비가 위치해 있다.
4) 성산읍
홍효자라고 불렸던 홍달한[1666-1749]은 정의현 고성리 사람으로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나 효성으로 어머니를 봉양하고, 어머니가 병을 앓게 되자 대변을 맛보며 증세를 살펴보고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약에 섞어 먹여서 천수를 누리게 하였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묘소에 집을 짓고 손수 돌을 날라 묘소에 산담을 쌓으며, 어렸을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상을 추복하였다. 1744년(영조 20년) 효자로 정표되었고, 1746년(영조 22년)에는 왕명으로 통정대부의 교지가 내려졌다. 그 후에도 가의대부의 교지와 동지중추부사의 관직이 내려졌다. 1749년 효자홍달한지려비가 건립되어 1991년에 개건되었는데 현재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 1리 526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현윤경은 아버지가 병상에 있을 때, 아버지를 좌우로 붙들어 몸을 편안하게 해드렸고 몸소 밥을 지어 봉양하기를 4-5년간 하였다. 아버지의 병이 위독하였을 때에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생명을 다소 연장시키기도 하였다. 현윤경은 1814년(순조 14년)에 효자로 정표되었다. 이후 1860년에 효자유향별감현윤경지려비가 건립되었는데 지금의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 1리 1395번지에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