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1028 |
---|---|
한자 | 石宙明 |
이칭/별칭 | 나비박사 |
분야 | 문화·교육/교육,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윤용택 |
출생 시기/일시 | 1908년 10월 17일 - 석주명 출생 |
---|---|
수학 시기/일시 | 1917년 - 석주명 평양공립종로보통학교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21년 - 석주명 숭실고보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22년 - 석주명 개성 송도고보로 전학 |
수학 시기/일시 | 1926년 - 석주명 송도고보 졸업, 일본 가고시마농림학교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29년 - 석주명 가고시마농림학교 박물과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 석주명 함흥 영생고보 박물교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 석주명 개성 송도고보 박물교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42년 - 석주명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미생물학교실 생약연구소 촉탁으로 위촉 |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 석주명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미생물학교실 개성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으로 전근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 석주명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미생물학교실 생약연구소 개성 본소로 복귀, 수원 농사시험장 병리곤충부장으로 전근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 석주명 국립과학관 동물학연구부장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49년 - 석주명 대한에스페란토학회 총무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50년 - 석주명 한국산악회 부회장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950년 10월 6일 - 석주명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4년 - 석주명 건국공로훈장에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8년 - 석주명 문화관광부로부터 4월의 문화인물에 선정 |
추모 시기/일시 | 2003년 - 석주명 기념 흉상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2005년 - 석주명기념사업회 창립 |
추모 시기/일시 | 2009년 - 석주명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한국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됨 |
출생지 | 석주명 출생지 - 평양 이문리 |
학교|수학지 | 석주명 수학지 - 일본 가고시마 |
활동지 | 석주명 근무지 - 제주특별지치도 서귀포시 토평동 |
활동지 | 석주명 근무지 - 경기도 수원시 |
활동지 | 석주명 근무지 - 서울특별시 |
묘소 | 석주명 묘소 - 경기도 성남시 |
성격 | 곤충학자 |
성별 | 남 |
본관 | 광주(廣州) |
대표 경력 | 송도중학 교사|경성제국대학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 책임자|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연구부장 |
[정의]
일제 강점기 서귀포에서 활동한 곤충학자이자, 제주학의 선구자.
[개설]
한국의 파브르로 불리는 석주명(石宙明)은 1908년 10월 17일[음력 9월 23일] 평양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 6일 서울에서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쳤다. 그는 우리나라 곤충학계에서는 나비박사, 에스페란토학계에서는 에스페란토 초기 운동가, 제주학계에서는 제주학의 선구자 등으로 불린다.
‘나비박사’, ‘에스페란토 운동가’, ‘제주학의 선구자’ 등의 석주명 별칭들은 서로 이질적이어서 전혀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지적 편력과 학문적 성과들은 융복합의 시대와 세계화[global]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석주명이 살았던 시기는 학문적 상황으로 볼 때, 지식분화 이전의 모습과 이후의 모습이 겹치는, 전통학문의 끝자락과 근대학문의 첫머리에 해당한다. 그의 학력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 개성의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1929년 오늘날 전문대학에 해당하는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현재 가고시마대학]를 나온 게 전부이다. 그런데도 그는 나비에 관한 한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의 수준급 전문가였다. 그는 좁게는 나비학자 내지는 곤충학자요, 넓게는 생물학자 내지는 자연과학자이다. 그리고 그는 제주도의 곤충뿐만 아니라 언어·역사·사회·문화 등을 연구함으로써 제주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가계]
평양 이문리(里門里)에서 광주(廣州) 석씨 평양파의 30대손인 석승서(石承瑞)와 전주 김씨 김의식(金毅植)의 3남 1녀 중 2남으로 1908년 10월 17일[음력 9월 23일] 태어났다.
석주명의 생년월일이 1908년 11월 13일로 잘못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1908년 음력 9월 23일은 양력으로 10월 17일이다. 이처럼 그의 출생일[양력]에 오류가 생기게 된 것은 누이동생 석주선이 1968년 11월 석주명의 유고집 『제주도수필』[보진재, 1968]을 발간하면서 발문에 “오빠! 오는 음(陰) 9월 23일[1968년 11월 13일]이 바로 오빠의 회갑이어요.”라고 쓴 것을 염두에 두고, 그의 생년월일을 1908년 11월 13일로 오해한 데서부터 비롯된다. 석주명 회갑일인 1968년 음력 9월 23일은 양력 11월 13일이지만, 그가 태어난 1908년 음력 9월 23일은 양력 10월 17일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잘못 알려져 온 석주명의 생년월일은 1908년 10월 17일로 정정(訂正)되어야 한다.
[활동 사항]
석주명은 중학교 교사로 13년 간 재직하면서 방학 때마다 전국 각지로 나비채집여행을 떠났다. 그는 영국왕립아시아협회의 의뢰를 받아 우리나라의 나비들의 동종이명 총 목록을 작성한 『조선산접류목록(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1940]를 출간함으로써 세계적 나비학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250종의 나비의 분포를 우리나라 지도와 세계지도에 그려 넣은 『한국산접류분포도』[유고집, 1973]는 우리나라 나비연구를 향한 그의 집념의 결실이다. 그는 남북분단 이전 시기를 살았던 덕분에 우리나라 전역을 샅샅이 둘러 볼 수 있었다. 나비를 채집하느라 전국 산하(山河)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지역이 달라지면, 자연과 문화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석주명은 제주도의 언어·풍속·습관 속에 우리나라의 옛 모습 내지 진정한 모습을 말해주는 자료가 많다는 것을 알고, 진정한 한국의 자태를 찾으려면 제주도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면서, 제주도의 자연·인문·사회 분야에 뛰어들어 『제주도방언집』[1947], 『제주도의 생명조사서』[1949], 『제주도관계문헌집』[1949], 『제주도수필』[유고집, 1968], 『제주도곤충상』[유고집, 1970], 『제주도자료집』[유고집, 1971] 등의 ‘제주도총서’를 발간함으로써 제주학의 초석을 다졌고 통합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석주명의 『조선나비이름의 유래기』[1947]와 『한국본위 세계박물학연표』[유고집, 1992]는 그가 통합학자이자 학문 융복합의 선구자임을 유감없이 드러내주는 저작들이다.
그는 ‘조선적 생물학’을 주창하면서 당대의 여러 분야 학자들과 국학(國學) 운동을 펼쳤던 민족주의자[(nationalist]이면서, 학문적 성과물은 세계의 학자들로부터 객관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 국제주의자[internationalist]였다. 그리고 그는 제주 지역 연구의 필요성을 깨닫고 제주학의 초석을 놓은 지역주의자[localist]이면서, 세계와 소통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국제어인 에스페란토 보급운동을 펼치면서 ‘에스페란토교과서 및 소사전’을 편찬한 세계주의자[globalist]였다. 또한 석주명은 우리나라 산천을 가장 많이 섭렵한 여행가이자 산을 가장 많이 오른 산악가였다. 이처럼 다양한 석주명의 모습을 한 마디로 규정짓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그의 이질적인 여러 모습들 속에는 서로 연결되는 맥이 있다.
그는 민족문화가 융성하기 위해서는 각 지역문화의 다양성이 인정되어야 하고, 표준어도 수도권의 언어를 채택하기보다는 전국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식민지 학자로서 인류문화가 융성하기 위해서는 각 민족문화의 다양성이 인정되어야 하며, 세계평화를 위해서 국제어[세계어]는 강대국 언어가 아니라 세계인들 모두가 배우기 쉬운 중립어라야 한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는 일관되게 지역과 세계, 부분과 전체, 특수와 보편 등을 아우르려고 하였던 것이다.
[저술 및 작품]
석주명은 학술논저 128편, 유고집 8권, 소논문과 기고문을 포함하는 잡문 180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이 가운데 잡문과 속편을 제외하고 그 자신이 학술적 업적으로 인정한 109편의 논저를 학문 영역별로 분류해보면 나비 관련 논저가 총 발표 수의 80%를 차지하고 있어, 석주명은 나비 전문가임이 분명하다. 교과서·사전·보고서·문집 등을 제외한 학술저서도 『조선산접류목록(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1940], 『조선나비이름 유래기』[1947], 『제주도방언집』[제주도총서 제1집, 1947], 『제주도의 생명조사서 –제주도 인구론』[제주도총서 제2집, 1949], 『제주도관계문헌집』[제주도총서 제3집, 1949], 『제주도수필 -제주의 자연과 인문』[제주도총서 제4집, 1968], 『제주도곤충상』[제주도총서 제5집, 1970], 『제주도자료집』[제주도총서 제6집, 1971], 『한국산 접류의 연구』[1972], 『한국산 접류 분포도』[1973], 『한국본위 세계박물학연표』[1992] 등 11권에 이른다.
한편 석주명은 스스로 반(半)제주인임을 밝힌 바 있다. 그는 제주도에 세 차례 방문하거나 체류했다. 첫 번째는 1936년 7월 21일부터 8월 22일까지 제주도의 나비를 채집하기 위해 1개월 남짓 체류한 것이고, 두 번째는 1943년 4월 24일부터 1945년 5월까지 경성제대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현재 서귀포시 토평동 소재 제주대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에 부임하여 2년 1개월간 근무한 것이고, 마지막으로 1948년 2월경에 제주도를 찾아 제주섬을 일주한 바 있다.
석주명은 6권의 ‘제주도총서’를 포함하여 제주도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논저 38편을 남겼다. 제주도총서 가운데 『제주도곤충상』을 제외한 나머지 5권이 인문사회 분야이다. 그는 제주도 연구를 통해 나비 전문가를 넘어 자연·인문·사회 분야를 아우르는 통합학자의 반열에 올랐던 것이다.
[묘소]
보문사 탑골승방[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3가]에 안치되어있던 유골을 1981년 9월 23일 남한산성 밑 능골에 안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석주명은 1964년 건국공로훈장 추서받았으며, 1998년 문화관광부의 ‘4월의 문화인물’에 선정되었고 2003년 서귀포시 토평동 네거리에 석주명 기념흉상이 건립되었다.
2005년 서귀포시에서 ‘석주명기념사업회’를 창립하였고, 2009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한국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