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12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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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釋奠大祭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문기 |
의례 장소 | 대정향교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향교로 16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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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 장소 | 정의향교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820-1 |
성격 | 유교 의례 |
의례 시기/일시 |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 |
신당/신체 | 향교의 대성전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 지역 향교에서 매년 봄과 가을에 지내는 제례의식.
[개설]
석전대제(釋奠大祭)란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문묘(文廟)에서 공자(孔子)를 비롯한 선성선현(先聖先賢)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을 말한다. 본래 ‘석전’이란 석채전폐(釋菜奠幣)의 줄임말로 ‘채(菜)’를 놓고 폐(幣)를 올리다‘는 의미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즉 석전은 나물 종류만 차려 올리는 석채(釋菜)와 달리 제물(祭物)과 폐백은 물론 음악과 헌작이 있는 성대한 제전으로, 옛 성현들을 기리기 위해 문묘에서 거행하는 제례의식이다.
대정향교와 정의향교에서는 매년 봄[음력 2월 상정일]과 가을[음력 8월 상정일]에 두 차례 제례를 지낸다.
[연원 및 변천]
후한 명제 때 모든 학교에 주공(周公)을 선성(先聖)으로, 공자를 선사(先師)로 하여 제향을 치르게 한 것이 사실상 석전의 시초가 된다. 북위(北魏)의 효문제 때에는 공자의 사당을 정식으로 건립하여 석전을 거행하였고, 당 태종 때에 이르러 중국 전역에 문묘를 세우는 제도가 확립된다. 당나라 이후 학교와 문묘는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는데, 송나라 때는 학교보다 문묘를 더욱 숭상하였다.
우리나라에 석전제가 도입된 시기는 개경에 국자감을 세우고 그 안에 선성전과 양무를 갖춘 문선왕묘를 설치한 고려 성종 때로 추정된다. 현종 때에는 문창후 최치원과 홍유후·설총을 종향하였고 인종 때에는 전국의 여러 고을에 학교를 세워 공자를 모시게 하였다. 충렬왕 때에는 국자감을 성균관으로 바꾸고 문묘를 대성전이라고 칭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유교적인 학교제도를 강화해나가면서 성균관과 문묘를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1411년에는 예조에서 석전의(釋奠儀)와 제사에 사용하는 폐백의 제도를 상세하게 정하였다. 1418년에는 예조에서 문선왕(文宣王) 석전제(釋奠祭) 의식을 올려 각도 계수관(界首官)의 예(例)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였다.
[신당/신체의 형태]
정의향교와 대정향교는 대성전에 공자를 주벽으로 그 양쪽에는 안자·증자·자사·맹자를, 동·서벽에 송조 4현과 우리나라 18현을 모시고 있다.
[절차]
석전의 의식절차는 홀기(笏記)[의식의 절차를 적은 글]에 의해 진행되며, 정의향교와 대정향교는 세부적인 절차가 약간 다를 뿐 거의 동일하다.
주요절차는 전폐례(奠幣禮)-초헌례(初獻禮)-아헌례(亞獻禮)-종헌례(終獻禮)-분헌례(分獻禮)-음복례(飮福禮)-망료례(望燎禮) 순으로 진행한다.
[축문]
단기 ○○○○년 [간지] 모월 삭모일 모관 아무개는 선성 대성지성문선왕[孔夫子]께 감히 밝게 고합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문선왕의 도(道)는 모든 임금보다 더 높고 만세의 제일 가는 스승이십니다. 이달의 상정일을 맞이하여 정결히 제사를 올림이 옳고 마땅합니다. 삼가 생폐[희생과 폐백]와 예제와 자성과 서품을 공경히 법식에 따라 차려 놓고 밝게 올리오니 복성공 안자, 종성공 증자, 술성공 자사, 아성공 맹자께서도 흠향하시고, 송조 사현과 우리나라 18현께서도 아울러 흠향하소서[維 檀君紀元四三三六年 歲次癸未 二月乙亥 朔初三日丁丑 某官[姓名] 敢昭告于 先聖 大成至聖文宣王 伏以 道冠百王 萬世宗師 玆値上丁 精禋是宜 謹以 牲幣醴齊 粢盛庶品 式陳明薦以 先師 兗國復聖公顔氏 郕國宗聖公曾氏 沂國述聖公孔氏 鄒國亞聖公孟氏 配 宋朝四賢 我國十八賢從 尙 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