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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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命圭 |
이칭/별칭 | 원서(元瑞),군서(君瑞),묵재(默齋),적안(適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웅철 |
출생 시기/일시 | 1618년 - 신명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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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62년 - 신명규 증광문과 병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66년 - 신명규 전라도 암행어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69년 - 신명규 집의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73년 - 신명규 제주 대정현으로 유배됨 |
활동 시기/일시 | 1680년 - 신명규 전라남도 진도로 이배됨 |
활동 시기/일시 | 1683년 - 신명규 해배됨 |
몰년 시기/일시 | 1688년 - 신명규 사망 |
유배|이배지 | 신명규 유배지 - 서귀포시 예래동 |
유배|이배지 | 신명규 이배지 - 전라남도 진도군 |
사당|배향지 | 봉암사 - 전라남도 진도군 |
성격 | 문신|유배인 |
성별 | 남 |
본관 | 평산(平山) |
대표 관직 | 정언(正言)|헌납(獻納)|사간(司諫)|부수찬(副修撰)|집의(執義) |
[정의]
조선 후기 서귀포시 대정현에 유배된 문신.
[가계]
신명규(申命圭)는 1618년(광해군 10)에 출생하였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원서(元瑞) 혹은 군서(君瑞), 호는 묵재(默齋) 혹은 적안(適安)이다. 조부는 대사성 신민일(申敏一)이고, 아버지는 신상(申恦), 어머니는 성산 이씨(星山李氏)이다. 자제로 신임(申銋)이 있다.
[활동 사항]
신명규는 1662년(현종 3)에 증광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1665년 지평·장령을 지냈고, 1666년에는 전라도 암행어사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어 정언(正言)·헌납(獻納)의 벼슬을 하였으며 1669년에 집의(執義)를 거쳐 사간(司諫), 부수찬(副修撰) 등 주로 대간(臺諫)을 역임하였다.
1673년(현종14)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을 옮길 때 능석(陵石) 축조 감독을 맡게 되었는데 이 때 석조물에 사소한 흠집이 나게 되자 남인 측에서 이를 트집으로 하여 능역 관리 소홀이라고 탄핵하였다. 그 결과 함께 능역 관리를 한 이정기와 제주로 유배되었다. 이정기는 정의현에 유배되었다.
신명규는 대정현 연례촌(延來村)[지금의 예래동]으로 유배되어 이애길(李愛吉)의 집에서 7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며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의 문하생 중 오정빈(吳廷賓)은 정묘식년(丁卯式年)[1687년]에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하였고, 1706년(숙종 32)에 제주시재(濟州試才)에 입격하여, 이듬해인 1707년에 치러진 정해별시(丁亥別試)에서 병과로 급제하기도 하였다.
신명규는 1680년의 경신환국 때 진도(珍島)로 이배되었다가, 1683년(숙종 9) 그의 아들 신임의 상소에 따라 유배에서 풀려났고 1688년(숙종 14)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신명규의 저서로는 『묵재기문록(默齋記聞錄)』이 있는데, 제주에서의 유배 생활 경험과 여행 기록을 서술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1725년(영조 1) 진도 유생 박제현(朴齊賢) 등의 상소로 진도의 봉암서원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