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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349
한자 開經浦
영어음역 Gaegyeongpo
영어의미역 Gaegyeongpo Ferry
이칭/별칭 개포나루,개포진(開浦津),개산강(開山江),개산포(開山浦),가혜진(加兮津)
분야 역사/전통 시대,지리/인문 지리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지도보기
시대 고대/삼국 시대/가야,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류영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포구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지도보기

[정의]

대가야시대부터 1970년대까지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 있던 포구.

[개설]

개경포(開經浦)개진면 개포리낙동강 변의 포구로 옛날에는 소금을 비롯한 곡식을 실어 나를 정도로 번창하였다. 개경포라는 이름은 현재 해인사에 보관된 ‘강화경판 고려대장경’[일명 팔만대장경]을 강화도에서 낙동강을 거쳐 개포나루를 통해 이운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달리 개포나루, 개포진(開浦津), 개산강(開山江), 개산포(開山浦), 개산진(開山津), 가혜진(加兮津), 가시혜진(加尸兮津) 등으로도 불렀다.

과거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여 대가야읍으로 들어올 때 가장 빠르고 쉬운 경로가 바로 개경포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개경포가 고령에서 낙동강과 가장 가까운 포구이기 때문이다. 낙동강은 대구와 현풍, 고령 지역을 흐르면서 S자형을 이루며 곡류하는데, 개경포낙동강의 곡류 구간 가운데 가장 서쪽에 있다. 이러한 입지 조건 때문에 개경포는 고령과 외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나루터로 활용되었다.

고대 이래 가장 좋은 교통과 운송 수단이 수로(水路)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고령 지역에서 외부로 통하는 수로로 낙동강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낙동강 수로의 중심지였던 개경포는 선사시대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낙동강 연안에서 내륙으로 들어오는 중요한 물산의 집산지로, 수로 교통의 중계지이자 교역장이었으며 고령 지역에서 생산된 특산품인 고령 도자기와 기와의 반출지로 유명하였다.

[관련기록]

개경포와 관련된 문헌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열전(列傳)」 김유신전[상]에서 가혜진으로 등장한다. “644년(선덕왕 13) 가을 9월에 왕이 [김유신을] 상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 등 일곱 성을 쳐서 크게 이겼다. 이로 말미암아 가혜진을 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삼국사기』「신라본기」 태종무열왕 8년조에도 “[신라에서] 군사를 증원하여 구원케 하였으나 가시혜진에 이르러 군대가 물러나 가소천(加召川)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이에 돌아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가혜진이 곧 가시혜진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 고령군조에 따르면 신복현(新復縣)의 옛 이름이 가시혜현(加尸兮縣)이므로 가혜성은 이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가시혜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으나,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지지(大東地志)』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등에서 현재의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일대로 비정하였는데 타당해 보인다.

따라서 가혜성은 가시혜현→신복현→우곡면으로 변화된 것으로 정리된다. 그렇다면 “644년 9월 김유신이 가혜성 등 일곱 성을 점령하고 가혜진을 열었다.”라고 하였으므로, 가혜진은 가혜성 부근에 있는 일곱 성의 중심 포구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점은 가혜진이 가시혜진으로 불렸던 것에서 더 분명해진다. 따라서 가시혜진은 오늘날 우곡면이나 그 인근에 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가혜진은 어느 곳을 지칭하는 것일까. 먼저, 가혜진과 오늘날의 개진은 음이 서로 통한다. 『삼국사기』「열전」 김유신전 원문에서 ‘개가혜지진(開加兮之津)’이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개진이라는 지명은 여기서 따온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개진면 직리에서 개포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열뫼고개, 즉 개산고개라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가혜진은 그 음이 변하여 오늘날의 개진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조선 성종 때에 완성되어 1530년(중종 25) 증보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29권 고령현 산천조에는 “개산강은 현의 동쪽 22리에 현풍현과 경계에 있는데 곧 성주 무계진(茂溪津)의 하류이다. 남쪽으로 흘러서 초계군의 경계로 들어가 가물창진(加勿倉津)이 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개산강은 『대동여지도』에 따르면 오늘날의 개진면 개포리개경포에 해당한다. 이후 조선시대에 간행된 지리지나 읍지, 고지도 등에는 거의 대부분이 개산강 또는 개산포로 표기되어 있다. 이상을 통해 『삼국사기』에 기록된 가혜진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개산강이며 오늘날의 개경포로 정리된다. 문헌 기록상 가혜진은 644년 처음 등장하지만 대가야시대에 이미 가혜진으로 불리면서 낙동강 변의 주요 나루로 기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변천]

고령 지역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였으며, 정치체가 등장한 것은 청동기시대부터이다. 따라서 선사시대부터 고령 지역 사람들은 낙동강을 이용해 외부 지역과 교통하였겠지만, 그것이 본격화된 것은 대체로 삼한시대 반로국(半路國) 시기로 여겨진다. 반로국은 주로 낙동강을 통해 그 중하류와 해안 지역의 변한 여러 나라들과 교류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가야시대에 이르러 대가야 사람들은 낙동강을 통해 가야 여러 나라는 물론 바다 건너 중국과 왜와도 왕성한 교역 활동을 하였다. 이후 낙동강 유역에 대한 신라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서쪽으로 진출하여 하동이나 순천 등 남해안과 서해안 등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령→낙동강[개경포]→남해안으로 이어지는 수로 교통로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물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삼한시대 반로국과 대가야시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용한 낙동강 포구는 개경포였을 것이다.

대가야가 멸망한 이후에도 개경포는 신라와 백제의 중요한 전략 요충지였다. 이는 신라와 백제가 치열하게 통일 전쟁을 벌이던 644년 신라가 낙동강 변의 가혜성[고령군 우곡면 일원], 성열성[고령군 성산면으로 추정], 동화성[성주 방면으로 추정] 등 일곱 성을 되찾고 가혜진을 열었다는 『삼국사기』「열전」 김유신전의 내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661년(문무왕 1) 백제 부흥군이 사비성을 공격하자 신라가 파견한 구원군이 낙동강을 건널 때도 가혜진을 이용하여, 이 당시에도 주요한 교통 요지였음을 알 수 있다.

후삼국시대에 이르러 고령 인근의 합천 대야성(大耶城)을 둘러싸고 신라, 후백제, 고려 등 후삼국이 각축을 벌였을 때도 개경포는 후삼국의 군대가 진군하는 군사 요충지로 인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고령읍에서 개경포로 향하는 도로변에 고령 개포동 석조관음보살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8호]이 있는데, 뒷면에 ‘옹희이년을유(雍熙二年乙酉)’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985년(고려 성종 4)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각 수준으로 보아 고려 초기 고령의 지방 장인이 제작한 보살상으로 개경포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안전한 통행을 기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말 우왕 때에는 낙동강을 따라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이때 대마도를 정벌한 박위(朴威)가 경상도 도순문사로 있으면서 고령현에서 왜구 35명을 베었는데, 이 왜구들은 개경포를 통하여 고령으로 들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고려시대에도 개경포는 꾸준히 낙동강의 주요 나루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개경포는 여전히 중요한 나루였다. 특히, 조선 태조 때에는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보관 중이던 강화경판 고려대장경을 개경포를 통해 해인사로 이운하기도 하여 개경포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였고, 1580년대 조선 선조 때에는 낙강칠현(洛江七賢)의 뱃놀이 터로도 유명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지리지나 읍지, 고지도 등에는 개경포의 명칭이 개산강 또는 개산포로 수록되어 있다. 아마도 개경포의 공식 명칭이 개산강[개산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고령 지역에서 수합된 공물과 진상품은 주로 개경포를 통해 중앙으로 운송되었다. 이 때문에 개경포에는 곡식과 어염(魚鹽)을 운반하는 수십 척의 선박과 수백 명의 선원이 왕래했고, 많은 소금이 들어와 고령을 비롯해 성주·금릉·합천·거창 등 내륙 지방으로 운반되었다. 이 시기 개경포에는 200여 호의 집과 30여 개의 객주가 있는 도진촌(渡津村)을 이루었다고 한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개경포에 고령의 세곡을 저장하는 강창(江倉)을 두었고, 강선(江船)이 여기서 세곡을 싣고 낙동강을 따라 김해, 창원, 부산, 사천 등의 조창으로 운반하였다가 남해와 서해를 거슬러 경창(京倉)으로 운반하였다.

[현황]

개경포는 구한말을 거쳐 1970년대까지 고령에서 대구의 달성, 현풍, 구지 지역으로 통하는 나루였으나 도로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점차 쇠락하여 현재는 나루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고령군에서는 나루터 인근에 개경포기념공원을 조성하고 합천군, 해인사 등과 함께 매년 팔만대장경 이운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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