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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809
한자 施文用
영어음역 Si Muny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장
출신지 중국 저장성[浙江省]
성별
생년 1572년연표보기
몰년 1623년연표보기
본관 성주

[정의]

조선 후기 임진왜란 이후 귀화한 중국인 무장.

[가계]

아버지는 명나라 병부시랑(兵部侍郞) 시윤제(施允濟)이다.

[활동사항]

시문용(施文用)[1572~1623]은 1572년 중국 저장성[浙江省]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당시 유격장군(遊擊將軍) 남방위(藍方威) 휘하의 행영중군(行營中軍)으로 종군하여 7년간 각지에서 많은 전공을 올렸다. 임진왜란 이후 신병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경상북도 성주에 우거하였다. 선조가 전공을 포상하여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고, 성주를 본관으로 하사하였다.

시문용은 군사·풍수·의술에 정통하여 1616년(광해군 8) 정인홍(鄭仁弘)의 추천을 받아 성지(性智)·김일룡(金日龍) 등과 함께 궁궐 및 왕릉 축조 사업에 참여하여 많은 업적을 쌓았다. 하지만 1623년(인조 1) 광해군 정권이 몰락하면서 후원자인 정인홍과 함께 시문용도 처형되었는데, 실록에는 토목 공사를 일으켜 백성을 가렴(苛斂)하였다는 죄목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시문용을 비난하는 측에서는 그가 중국 군사로 도피한 자이며, 정인홍에 의하여 우대·천거 받은 이유가 정인홍의 조상이 저장성 출신이었으며 그의 풍수와 점복(占卜) 능력을 정인홍이 이용하기 위한 것이라 주장하였지만, 당쟁에 따른 편견일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시문용 후손들은 그의 사망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한다. 후손들은 광해군의 실각과 함께 시문용이 성주군 수륜면 보월리 아래맏질마을로 내려와 자연과 술을 벗 삼아 여생을 누리다가 1643년(인조 21) 세상을 떠나 마을 뒷산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그 후 시문용의 후손들은 맛질마을과 고령 꽃질마을 등으로 옮겨갔다.

[저술 및 작품]

시문용은 문장에도 능하여 『병학기정(兵學奇正)』, 『감여지남(堪輿指南)』, 『의복묘결(醫卜妙訣)』 등을 저술하였다.

[묘소]

묘소는 성주군 수륜면 보월리 아래맏질마을 뒷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정조박문수가 주청하여 임진왜란 당시의 전공과 명나라 군대 파견에 힘쓴 시윤제의 노력에 대한 포상으로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그의 후손은 천역에 사역되지 않게 되었다. 1834년 유림에서 풍천재(風泉齋)를 세우고, 이듬해에 유허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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