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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836
한자 鄭譍
영어음역 Jeongeung
이칭/별칭 응지(譍之),소우(素愚)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서울특별시
성별
생년 1490년연표보기
몰년 1522년연표보기
본관 동래
대표관직 홍문관전한겸예문관응교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증조할아버지는 경산현령을 역임한 정효경(鄭孝卿)이고, 할아버지는 통훈대부 행고양군수를 지낸 정수(鄭穗)[1435~1497]이며, 아버지는 통훈대부 행장예원사평을 지낸 정인후(鄭仁厚)[1454~1532]이다. 어머니는 충주최씨(忠州崔氏)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 최순(崔洵)의 딸이다. 부인은 둘을 두었는데 고령신씨(高靈申氏) 부사(府使) 신렴(申濂)의 딸과 연일정씨(延日鄭氏) 전랑(銓郞) 정완(鄭浣)의 딸이다. 후사가 없어 생질(甥姪) 전주이씨 이의양(李義陽)이 제사를 받들다가 후에 종질(從姪) 정숙하(鄭淑夏)가 살아 있는 동안 제사를 모셨다.

[활동사항]

정응(鄭譍)[1490~1522]은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14년(중종 9)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에 제수되었다. 1516년(중종 11) 김안로(金安老)·김정(金淨)·소세양(蘇世讓)·유옥(柳沃)·유돈(柳墩)·정사룡(鄭士龍)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경연전경·저작·박사를 역임하였고, 이어 경연사경(經筵司經)에 재임 중 내수사(內需司) 장리(長利) 등 구제(舊制)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이어 홍문관수찬에 승보(陞補)되었고, 사간원정언으로 사헌부대사헌 이행(李荇)을 탄핵하여 면직하게 하였으며, 그 뒤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거쳐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다.

1518년(중종 13) 사헌부지평으로 전보되었는데, 이때 훈구파로부터 조광조(趙光祖)를 영수로 하는 사림파 집단으로 지목되어 모함을 받기도 하였으며, 같은 해 성리학의 이론서인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진강(進講)할 수 있는 인물로 추천되었다. 그 뒤 사간원헌납을 거쳐 1519년(중종 14) 이조정랑을 역임한 뒤 홍문관응교를 거쳐, 홍문관전한 겸 예문관응교로 발탁되었다. 그해 겨울 훈구파인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에 의하여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무죄를 주청하였으며 결국 이에 연루되어 부여로 유배되었다가 1522년(중종 17) 귀양지에서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사림파의 영수인 조광조로부터 크게 쓰일 인물로 촉망을 받았으며, 기묘사화 이전 개혁 시기에 사림파로서 전통적 명분의 회복, 새로운 통치 질서의 수립 등에 크게 기여하였다.

[묘소]

묘소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의 양원촌(養源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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