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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C020103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집필자 이창언

도진마을 모현정에서는 매년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에 옛 문연서원(文淵書院)에서 배향하던 오현(五賢)에 대한 향사를 지내고 있다.

문연서원은 원래 학암(鶴巖) 박정번(朴廷璠)이 세운 서당이었는데, 1696년(숙종 22)에 낙락당(樂樂堂) 박택(朴澤)과 월오 윤규를 배향하는 서원이 되었다.

이후 1700년(숙종 26)에는 죽연(竹淵) 박윤(朴潤)과 매헌 최여설을 추향했고, 박정번의 사후에 지역 유림에서 논의하여 함께 배향하면서 문연서원에서는 모두 다섯 분에 대한 향사를 지내게 되었다.

[문연서원의 오현은 누구인가?]

문연서원에서 배향하던 오현 중에서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박정번박정번의 백부이자 효자인 박윤과 아버지 박택은 고령박씨 도진종회를 구성하는 세 지파의 파조들이다. 윤규는 학자로서 박정번의 스승이었으며, 그의 후손들이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에 세거하면서 파평윤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양천이 관향인 최여설의 후손은 고령군 쌍림면 하거리 학골마을에서 세거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세 문중의 후손들은 매년 도진마을 모현정에서 선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한 향사를 지내고 있다.

고령 지역의 오현을 배향한 문연서원은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이에 지역 유림들은 도진마을 모현정에서 오현에 대한 향사를 지내고 있다.

모현정은 1803년에 축조되었는데, 문연서원이 훼철된 이후 이곳에서 향사를 지내게 되면서 문연재(文淵齋)로 불리기도 하였다.

훼철된 문연서원이 있던 자리에는 당시 벌목하지 않은 회나무만 남아 있다. 지역의 유림들은 서원이 훼철된 이후 모현정에서 향사를 지내 오기는 했으나 늘 서원의 복원에 대한 염원을 간직한 채 살아 왔다. 지역 유림의 이 같은 소망은 일제 강점기 말엽에 문연서원 터에 유허비를 건립하면서 부분적으로나마 이루어졌다.

[오현의 향사 절차]

2010년 모현정에서 거행된 향사는 음력 3월 초정일인 4월 17일 오전 10시 30분경에 시작되었다. 원래 서원의 향사 의례는 향사를 지내기 전날 행하는 분정례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모현정에서 지내는 오현에 대한 향사는 당일에 분정을 한다. 제의를 지내기 직전에 의관을 갖춘 참석자들이 읍을 하고 둘러앉아 헌관, 대축, 집례, 봉작, 봉향, 사준, 알자, 찬인을 정한다. 이날 초헌관은 고령박씨 후손, 아헌관은 양천최씨 후손, 종헌관은 파평윤씨 후손이 담당하였다.

제의는 모현정 대청에서 이루어지는데, 6·25전쟁 기간 동안 매장한 위패를 대신하여 지방을 사용하고 있다. 집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모현정의 마당에 정렬하여 집례의 진행에 따라 제의에 참여하였다. 집례는 홀기로서 관세, 초헌, 독축, 아헌, 종헌, 소지, 음복례의 순으로 제의를 진행하였다. 축문은 제의 때마다 작성하지 않고 장기간 사용할 수 있도록 미리 제작된 것을 이용하고 있다. 오전 10시 반경부터 분정례로 시작된 의례는 11시 반경에 마무리되었다.

[전승을 위한 노력]

문연서원이 훼철된 이후 고령박씨 종원들은 서원을 복원하기 위해 그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비록 서원은 훼철되었으나 오현에 대한 향사도 중단하지 않고 지속해 왔다. 최근에는 6·25전쟁 동안 마을 뒷산 위패를 매장한 곳에 표석을 세울 계획도 세우고 있다. 그러나 향사를 주재하는 집단의 숙원이었던 서원의 복원은 근래 몇 년 동안 중단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서원이 지니는 교육적 기능과 의미가 약화되고 있고, 서원의 관리에 따른 부담이 크다는 것이 서원 복원 논의가 중단된 주요 배경이다. 그럼에도 향사를 주재하는 집단은 서원을 복원하여 선현의 유지를 계승한다는 기본 취지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정보제공]

  • •  박태규(남, 1938년생, 우곡면 도진리 주민)
  • •  박돈헌(남, 1948년생, 우곡면 도진리 주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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