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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C030103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집필자 박경용

[도진 사람들의 충절]

100호 이상의 집성촌을 이룬 마을! 조선 전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외침에 나라를 구하려는 충(忠)과 부모에 대한 효(孝)가 존재했고,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구비한 마을! 한 명의 큰 인물보다 한 마을, 한 가문 출신으로 충과 효행이 누대에 계승되는 마을!

1350년대 사재감(司宰監) 소윤공(少尹公) 박경(朴景)[중시조 부창정(副倉正) 박환(朴還)의 8세손]이 마을을 개척한 이후 수많은 도진리 사람들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존망이 달린 위기 상황에서 충절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입향조의 증손자 박형(朴炯)[11세손]은 여진족의 침공에, 12세손 박계조(朴繼祖)[1465~1525]는 삼포왜란 때 각각 큰 공을 세웠다. 14세손 박정완(朴廷琬)[1453~1613]과 박정번(朴廷璠)[1550~1611] 형제, 15세손 박효선(朴孝先,)[1579~1619], 박광선(朴光先)[1569~1631], 박원갑(朴元甲)[1564~1618]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송암(松庵) 김면(金沔)의 의병진에서 큰 공을 세웠다. 또 16세손인 박응형(朴應衡)[1605~1658]은 병자호란의 국치를 당하자 충분시(忠憤詩)로 비분강개했다.

이와 같은 충절의 정신은 근·현대에도 이어져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 투쟁과 3·1만세 운동으로, 6·25전쟁 때는 전장에 몸을 던지는 구국혼의 실천으로 이어졌다.

25세손인 성균관 생원 박기열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만주로 가서 구국 무장 투쟁에 가담했다.

26세손인 박경점(朴庚占)도 건국에 기여한 공로로 국가로부터 광복장(光復章)을 수여받았다.

박기열의 아들인 26세손 박재필(朴在弼)[1885~1955]은 1919년 4월 6일 일제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며 도진리 만세 운동에 불을 지펴 4월 8일 이웃 마을까지 확산시켰다. 이로 인해 일족 아홉 명을 포함한 스물일곱 명이 무더기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각 1년 6개월에서 6개월 동안 구금을 당했다.

만세 운동으로 민족혼을 떨친 공로로 박재필을 포함한 박기로(朴埼魯)·박채환(朴埰煥)·박영화(朴英華) 등 네 명에게는 애족훈장이 추서되었으며, 박영우(朴英友,)·박영순(樸英詢)·박정렬(朴貞烈)·박경회(朴景會)·박쌍암(朴雙岩) 등 다섯 명에게는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6·25전쟁 때는 육군사관학교 7기생 27세손 박수헌(朴壽憲)[1923~1958]이 육군 중위로 참전하여 동부전선[울진, 영덕, 포항]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전쟁 후 그는 중령으로 진급하여 충무무공훈장과 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았지만, 전장에서 당한 관통상의 후유증으로 35세에 병사하였다. 그는 사후 육군 대령으로 추서되었다.

[대를 이어 가며 전승되는 도진 사람의 효행]

이와 같은 충절에 못지않게 도진 사람들의 효행도 대를 이어 가며 전승되었다. 중시조의 13세손인 박윤(朴潤)[1517~1572]은 노모에 대한 효행으로 선조 때에 정려 복호(呈閭 復戶)되었으며, 그의 아우 박택(朴澤)[1521~1566]도 마찬가지로 지극한 효자였다. 17세손 박사전(朴思全)의 부인 함안조씨[1641~1717]는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단지수혈(斷指受血)을 했으며, 20세부터 수절하여 30여 년간 시모를 정성들여 봉양하였다. 이에 지역 유생들이 장계를 올려 경종 대에 효부 열녀로 정려 복호되었고, 효행의 행장문이 지금까지 전해짐은 물론 마을에 열부(烈婦)의 비도 세워졌다.

또한 3대에 걸친 효행이 지역 사회의 귀감이 되기도 했다. 이들은 17세손인 박태중(朴泰重)[1677~1729]과 그의 아들 박섬(朴暹)[1696~1761], 손자 박사연(朴師淵)[1732~1776] 등으로서 인근 고을 100여 명의 선비들이 정부에 3대 ‘효행청여정문(孝行請閭呈文)’을 올리기도 했다.

26세손인 박기언(朴基彦)[1891~1956]은 21세 때 노모가 학질에 걸려 사경에 이르러 온갖 치병 노력에도 차도가 없자, 인육이 양약이라는 말을 듣고 심야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쇠고기라 속이고 노모에게 드려 병을 낫게 했다. 그의 사후 군내 유생들이 효행을 칭송하고 이를 본받고자 무본계(務本契)를 모아 추모했으며, 효행비도 세웠다.

27세 손부인 순창설씨[설옥순, 1942~]는 신혼 초 시아버지가 중풍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하고 이어 시어머니도 안질을 앓아 실명하자 30여 년 동안 지극한 정성으로 보살피고 봉양하였다. 이러한 효행으로 설옥순 씨는 1995년 대통령으로부터 효부상을 받았다.

28세 손부 영월엄씨[엄상암, 1933~]는 19세에 결혼했는데, 당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목덜미 발치(拔齒)와 풍단(風丹) 병을 각각 앓고 있었다. 엄상암 씨는 발치는 환부를 입으로 빨아내고 풍단은 인분 약으로 치료하여 호전시켰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편[박태균]이 폐병에 걸리자 포목 행상으로 가정을 돌보며 수십 년 동안이나 병 구환에 정성을 다하였다. 이러한 효행으로 엄상암 씨는 1982년 고령군수 효부상과 고령박씨 종중 표창을 받았고, 1984년에는 고령군노인회지부 효행상도 받았다.

[정보제공]

  • •  박돈헌(남, 1948년생, 우곡면 도진리 주민, 도진충효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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