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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나루터[성산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268
한자 陶津-星山面-
영어음역 Dojinnaruteo
영어의미역 Dojin Ferry
분야 역사/전통 시대,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득성리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황상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나루터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득성리 지도보기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득성리에 있던 가야시대~조선시대 나루터.

[개설]

도진나루터가 위치한 고령군 성산면 득성리는 조선 인조 때 병자호란 직후 전라도 지방 나씨(羅氏)가 이주하여 개척하였다 전한다. 당시 사부리 도요지(沙鳧里陶窯址)기산리 도요지(箕山里陶窯址)에서 생산되는 도자기를 타지방으로 수출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도진나루로 모여들자 마을 주민들이 많은 이득을 얻어 마을 이름을 ‘득성(得成)’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도자기를 실어 나르던 나루라 하여 도진나루터라고 불렀다고 한다.

사부리 도요지는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초까지 사용되었으며, 운수면 대평리든봉지에서 남서쪽 약 300m 떨어진 골짜기에 그 흔적이 있다. 예부터 이곳 주민들은 사부리 도요지가 있는 골짜기를 도장골, 가마골, 사기골 등으로 불렀다. 자기(磁器) 조각이 흩어져 있는 산록은 양편에 작은 계곡을 끼고 있는데, 그 사이는 완만한 경사지이며 그 아래쪽은 도로 공사로 인해 깎여 있다.

기산리 도요지성산면 기산리의 사부리마을 입구에 위치한다. 현재 기산리 도요지에서는 고려 말기부터 조선 전기에 이르는 4개소의 가마 자리가 확인되고 있는데, 그중에서 청자 요지는 14세기 후반경의 것으로 대접과 접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대체로 자기편은 벽이 두껍고 굽은 투박하여 모래받침으로 번조(燔造)되었는데, 문양은 인화 시문된 상감 문양이 소량 드러나 있다. 대체로 두터운 시유와 기면에 암녹색 조를 띠고 있다.

경상북도 최남서단에 위치한 경상북도 고령 지역은 낙동강의 중하류 지역으로, 낙동강 수운과 풍부한 수자원을 바탕으로 신문물의 유입과 농업이 발달하여 대가야 문화의 중심지로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고령 지역을 흐르는 낙동강은 대부분 강폭이 400~700m가 넘는데, 그만큼 고령은 낙동강의 영향을 많이 받아 온 지역이다. 강폭이 700m가 넘는 곳으로는 개포나루터가 있는 개진면 지역을 비롯해 지금도 우곡면과 달성군 현풍 지역의 사람과 물건을 운반하고 있는 우곡의 배암진 지역, 다산면, 성산면 등 4개 지역이 이에 해당된다. 이같이 낙동강의 풍부한 수자원을 밑거름 삼고 있는 고령 지역은 토지가 비옥해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하였다.

[변천]

고령 지역을 흐르는 낙동강은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개산강’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고령 지역은 낙동강 중류의 우안에 위치해 있는데, 예로부터 토양이 비옥하여 물산이 풍부하고 낙동강을 이용한 수상 교통의 요충지로서 널리 알려졌다. 이에 따라 낙동강 수운을 이용하여 관물과 공물을 수송하였으며, 고령 관내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인근 경상도 지역의 대소비지인 대구로 이동하여 팔기 위하여 나루들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에 도진나루터는 달성군 위천으로 건너가는 뱃길로서, 도자기를 실어 창녕과 구포를 거쳐 일본까지 이동하던 루트로 발달하게 되었다.

도진나루터는 대가야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로 이용되었다. 도진나루 인근에 봉화산[108m]이 있는데, 일명 말응덕산으로 불리는 봉화산은 나지막하지만 가파르다. 산의 형태가 끝이 뾰족한 것처럼 보이지만 낙동강과 반대편에는 움푹 들어간 곳이 있다. 당시 이곳에는 대가야 군사들이 낙동강을 왕래하는 모든 선박과 군사의 이동을 철저히 감시하였을 보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가야 군사들은 봉화산을 중심으로 군사적 이동을 감시하면서 도진나루를 이용하여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도진나루는 ‘도진(陶津)’이라는 이름이 굳어지는데, 인근 사부리 도요지기산리 도요지에서 생산된 도자기를 실어 나르던 기능에서였다. 당시 마을의 동쪽이 낙동강가의 높은 절벽과 깊은 물로 되어 있어 ‘멍더미’라 하고, 기산리 도요지사부리 도요지에서 생산된 질그릇을 이곳 나루를 통해 반출하여 ‘질나루’, ‘도진’, ‘덕산포’라고도 하였는데, 현재 두 도요지 모두 외형상 뚜렷한 가마의 형태는 남아 있지 않다.

대가야시대의 군사적 기능과 조선시대의 도자기를 실어 나르던 나루에서 이후 도진나루는 임진왜란 때 고령의 도공들이 붙잡혀 낙동강 배를 타고 일본으로 끌려간 나루가 된다. 당시 사부리 도요지기산리 도요지를 중심으로 주로 상품 자기를 구웠던 많은 도요지가 있었는데, 이에 고령에는 고령토라는 흙이 있어 많은 도공들이 있었다. 이들이 도진나루를 통해 일본으로 끌려갔다는 것이다.

또한 도진나루는 인근 나루 중에서 규모가 큰 축에 속해 수운(水運)이 발달할 당시 소금, 비단, 수산물 등을 가득 실은 큰 범선 5~6척이 닻을 내리고 정박하였는데, 이곳의 특산물인 대마 등의 농산물과 물물 교환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멀리는 남원, 거창, 함양, 고령, 성주, 현풍 등에서까지 보부상이 다녀가며 하시를 이루어 자연스럽게 전국의 흥행단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근대 교통수단의 등장과 다리의 건설로 더 이상 도자기를 실어 나르고 많은 상인들이 북적이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위치]

도진나루터봉화산 아래 낙동강 강변에 위치한다. 봉화산낙동강을 굽어볼 수 있는 요충지로서, 조선시대에는 봉화산 위에 봉수대를 두었다. 그래서 이름을 봉화산, 혹은 봉수산이라 불렀다. 봉수대는 동쪽으로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선산리와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달성군 현풍면 소이산에 연결된다.

현재 봉화산 위에는 사망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사망정 곁에는 2003년 5월에 제막된 낙강칠현비가 있는데, 낙강칠현은 옥산 이기춘(李起春)[1541~1597],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청휘당 이승, 모재 이홍우(李弘宇), 송암 김면(金沔), 대암 박성, 육일헌 이홍량 등이다. 이들 낙강칠현은 어린 시절부터 40여 년 장구한 세월 동안 서로 공경하고 아끼며 깊은 인간애로 사귀어 낙동강 유역의 칠현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현황]

2010년 현재 도진나루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현풍에서 고령으로 가는 낙동대교 근처가 옛 도진나루터이며, 그 자리에 지금은 박석진교가 놓여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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