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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무계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361
한자 二次茂溪戰鬪
영어의미역 The Second Mugye Battl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호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투
발생(시작)연도/일시 1592년 6월 18일경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 지도보기
관련인물/단체 김면

[정의]

1592년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에서 김면이 왜선 두 척을 포획한 전투.

[개설]

2차 무계전투에 대한 기록은 『문수지』와 『용사일기(龍蛇日記)』에만 보이고 『모계일기(茅谿日記)』나 『고대일록(孤臺日錄)』 등의 다른 자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2차 무계전투의 노획 물품은 개산포대첩의 노획품과 함께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게 보내졌기 때문에 개산포대첩에서 획득한 것으로 서술된 기록도 있다.

[경과]

1차 무계전투 이후 거창에서 고령으로 온 의병장 송암(松庵) 김면(金沔)은 1592년(선조 25) 6월 9일 개산포대첩을 승리로 이끌면서 왜군에게 타격을 가하였다. 이즈음 경상도 지역의 왜적은 성주와 개령에 주둔하고 낙동강을 주요 보급로 및 교통로로 이용하면서 호남으로 들어가고자 하였기 때문에 낙동강에 그들의 왕래가 빈번하였다. 무계 지역을 확보한 김면의 의병군이 6월 18일경 낙동강을 통과하던 왜선 두 척을 발견하여 공격한 것이 2차 무계전투이다.

[결과]

김면이 이끄는 의병군은 무계진에서 낙동강을 내려오는 적선 두 척을 포획하여 배에 가득 실은 물건을 빼앗았다. 이때 빼앗은 물품은 세조의 광묘(光廟) 어휘가 적혀 있는 금지장자(金紙障子)와 제복(祭服) 두 벌, 적석(赤舃)[왕이 정복을 입을 때 신는 붉은 신] 두 켤레 등 궁중에서 사용되는 진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아마도 왜적이 노획한 내수소(內需所)의 물건을 낙동강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한 듯하다. 빼앗은 물품은 개산포대첩의 노획품과 함께 초유사 김성일에게 보내졌다.

[의의와 평가]

개산포대첩에서 왜선 1척을 나포한 데 이어 2차 무계전투에서 왜선 2척을 포획한 것은 왜군에게 큰 타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왜군의 영산-창녕-현풍-무계-성주를 잇는 낙동강 수운 확보 계획이 김면 등의 의병 활동으로 심대한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경상우도 지역의 보전은 물론 경상도를 통해 전라도로 침공하려던 왜군의 작전 계획이 무산되었다는 점에서 2차 무계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대표적 전투로 평가받을 만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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