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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600
한자 竹牖宗宅
영어의미역 Head Residence of Jukyu
분야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 96-2[송림2길 70]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수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가
양식 팔작지붕 기와집
건립시기/일시 1700년대 말
정면칸수 5칸|4칸[안채]|3칸[사당]
측면칸수 2칸|2칸[안채]|1칸[사당]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 96-2[송림2길 70]지도보기
소유자 고창오씨 죽유공파 종중
문화재 지정번호 경상북도 기념물 제139호
문화재 지정일 2001년 8월 20일연표보기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전통 가옥.

[개설]

죽유 종택은 조선 전기 문신이자 의병장인 오운(吳澐)을 기리기 위해 지은 종가이다. 오운[자는 태원(太源), 호는 죽유(竹牖) · 죽계(竹溪)]은 1540년에 출생하였으며 1561년(명종 16)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성균관에 등용되어 학유, 직강 등을 지내고 충주목사, 성균관 사성을 지냈다. 오운은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의 수병장으로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령, 현풍, 합천 부근에서 공을 세웠다.

[위치]

쌍림면사무소에서 송림2리 마을회관 방향에 있는 서원마을 내에 위치한다. 죽유 종택서원마을에서도 최북단에 있으며 우측에는 사당이 있고 남동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 매림서원이 있다.

[변천]

1700년대 말에 지어진 죽유 종택은 본래 고령군 쌍림면 매촌리에 위치하였으나 1920년 대홍수로 인해 사랑채만 그대로 현재의 자리에 옮겨왔다. 그외의 안채와 나머지 건물은 새로 지었으며 오운의 위패를 모신 사당은 1953년에 새로 지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서당으로 사용되었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고령 지역의 본거지로 쓰였다. 해방 이후 6·25전쟁 당시에는 노동당 사무실로 쓰였다.

[형태]

죽유 종택은 입구의 솟을대문을 지나 들어가면 ‘ㅁ’자형 배치를 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 있으며, 좌측에는 중사랑, 우측에는 유물관이 있다. 뒤쪽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안채가 있다. 죽유 종택 우측에 있는 사당은 정면에 삼문과 담장이 둘러져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현황]

죽유 종택은 2001년 8월 20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죽유 종택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류 7종 110건, 전적류 7종 12책 외에 오운이 임진왜란 당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말안장 등이 보물 제1203호로 지정되어 죽유 종택 유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유물관에 보관 중인 자료로는 보물 제1203호 외에도 18세기 초에서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고문서 80건, 유물 및 현판 6건, 책판 166건, 서적 234건 428책이 보관되어 있다. 고문서는 준호구, 호구단자(戶口單子) 등의 호적류가 대부분이며 상서(上書), 첩정(牒呈), 시권(試券) 등이 있다. 책판은 『죽유선생문집』과 『한계선생문집』이 있다.

[의의와 평가]

죽유 종택은 조선시대를 지나 일제강점기와 현대의 6·25전쟁까지 역사적인 사건과 함께 해온 곳이다. 특히 3·1운동 때에는 박은식(朴殷植)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의하면 당시 인근 지역인 칠곡이 집회인 수가 500명, 김천 500명, 달성 500명, 성주 1,400명이었으나 고령은 3,800명이었던 점으로 보아 고령은 다른 지역보다 운동이 활발히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운동의 본거지에 죽유 종택이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죽유 종택이 당시 고령 지역민의 의식 속에서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