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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603
한자 高靈鄕校
영어음역 Goryeonghyanggyo
영어의미역 Goryeong County school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608[향교길 29-18]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동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향교
양식 맞배지붕 기와집
건립시기/일시 1414년|1663년[중수]연표보기연표보기
정면칸수 5칸[명륜당]|3칸[대성전]
측면칸수 3칸[명륜당]|2칸[대성전]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608[향교길 29-18]지도보기
소유자 고령향교재단
문화재 지정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9호
문화재 지정일 1990년 8월 7일연표보기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에 있는 조선 전기 향교.

[개설]

향교는 원래 중앙에 대응하는 지방 향읍의 학교를 의미하며, 고려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조선 초기에 이르러 전국의 거의 모든 마을에 설립되었다. 따라서 향교는 중앙의 성균관(成均館)과 함께 국가의 양대 관학으로서 지방사회에서 성리학의 교육과 성현들을 배향하기 위해 설립된 공립 교육 기관이자 향사기관이다.

일반적으로 향교에는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한 건물인 명륜당과 공자(孔子)를 중심으로 여러 성현들을 모시고 향사하기 위한 대성전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의 향교는 지방 관학의 중등 교육 기관으로 유교 이념의 대중화와 유교적 교양을 갖춘 인재 양성에 일차적 목적이 있었으나, 유학의 대성인 공자를 비롯한 중국 및 우리나라의 성현을 배향하는 의례적 교화 기능도 수행하였다. 또 사회 교화, 공론 형성, 지방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고령향교는 고령 지역의 지방 교육과 향사를 담당하였다. 고령향교와 관련된 자료로는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고령현학중수기」, 월촌 이익량의 「임오이건기」, 학양 박경가(朴慶家)의 「기묘현학중수기」 등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령지』, 『교남지』 등의 지리지와 읍지 등이 있다. 고령향교는 건립 이후 4차례 정도의 이건을 거쳤다고 한다.

[변천]

고령향교가 처음 창건된 시기와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1413년(태종 13) 고령 지역에 현감을 파견한 것으로 보아 이때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건립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을 참조하면 “현 서쪽 2리의 이산(耳山)[주산] 아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다시 ‘관백전 우협(官栢田 右峽)’으로 1차 이건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시기 및 위치는 알 수 없다. 그러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향교가 소실되자 위패만을 옮기게 되었다. 즉,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향교의 노비가 위패를 주산 아래인 동고(東皐) 후등(後嶝)[지금의 연조리 관음사 뒤편]에 매안하였다. 난이 진정되고 난 후 그 자리에 향교를 중건하였는데, 이것이 2차 이건이었다.

그 후 1663년(현종 4) 현감 조봉원이 부임하면서 중수 공역을 시작하였다. 당시 공역은 1663년 11월 대성전을 입주하고 1664년 3월 공역을 마쳤다. 대성전의 현판은 1663년 9월에 쓰고, 1665년 7월에 송시열로부터 중수기를 받았다. 이후 고령향교의 경영이 오래되었고, 교지가 불길하여 묘우에 변괴가 빈번했다고 한다. 이에 현감 구문유(具文游)가 고을 인사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건 공사를 시작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1701년 9월 부임한 현감 구문유에게 이익량을 위시한 사족들의 향교 이건 건의를 받아들여 조정에 주청하였다. 이듬해인 1702년 2월 이건 허락과 함께 향축이 내려왔으며, 이건지를 택하고 공역 감독을 정하였다. 같은 해 3월에 터를 닦고, 문묘의 위패를 객사로 옮기고 묘우를 파하였다. 4월에 입주, 상량하였으며 상사 오수규가 상량문을 지었다. 6월에 위패를 다시 묘우로 이안하는 환안례를 올리고 나머지 건물을 수축함으로써 공역을 마쳤다. 이로써 3차 이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향교의 이건 과정에는 여러 가지 상서로움이 나타났다. 즉, 문묘터를 닦을 때 땅 속에서 옥기와·연와·주춧돌 등이 출토되었고, 문묘 낙성 시에는 백작이 주위를 날아다녀 사람들은 이곳에 비범한 길지임을 알았다고 한다. 옥기와 등이 출토된 것에 대해 이건지가 구묘지(舊廟址)였기 때문이라거나, 혹은 대가야시대의 궁전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이건 지역이 처음 창건된 향교지이거나 대가야 궁성지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재, 고령향교 인근에는 통일 신라 시대의 당간지주가 있고, 향교에는 사찰의 것으로 보이는 석재와 탑재 등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를 종합해 보면, 현재 향교의 터는 몇 차례의 변화가 있었다. 즉, 대가야시대의 국도 중심인 왕궁지였다가 통일신라시대에는 사원이 세워졌으며, 조선 초기가 되면 최초의 향교가 설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향교가 다른 곳으로 이건되었다가 1702년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겨오게 된 것으로 정리된다.

다음 묘우가 완성되자 백작이 주위를 배회한 것을 옛날 대가야의 도읍을 건립할 때 나타난 영험과 향교의 묘우를 세울 때 나타난 영험과 대비시키고 있다. 또, 백작이 날아든 것은 향교의 지기가 영험하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고령 지역에 문학사(文學士)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이 고령향교대가야의 건국과 궁궐의 지기를 계승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령향교는 1819년 현감 권중이가 부임하면서 다시 중수하였다. 1818년(순조 18) 권중이가 현감으로 부임하자 향교의 중수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에 재임 최상붕이 책임을 맡아 자금을 모으고, 1819년 3월 공역을 시작하여 4월에 향축이 내려왔고 위패를 객사의 정당(正堂)에 이안하였다. 그리고 5월 환안례를 행함으로써 공역을 마쳤다.

이때 박경가가 중수기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도 고령향교는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대성전과 명륜당은 1700년대 초의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명륜당은 일제 강점기 때 학교 건물로 사용한 바 있어 기둥의 일부가 훼손된 흔적이 있다.

[형태]

현재의 고령향교는 대성전과 명륜당, 동·서무, 빈흥재, 내·외삼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관리사와 화장실이 있다. 입지는 대가야읍 뒤편의 경사가 약간 높은 터에 남서향하여 건물을 앉혀 놓았고, 대지를 2단으로 정지하여 대성전을 뒤쪽에 배치하고 같은 축선 상에 명륜당을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배치는 1702년 이건과 1819년 중수 당시의 것과는 변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18세기 초에서 19세기 초까지는 대성전을 위시하여, 명륜당, 동·서재, 고사, 내·외삼문, 주방, 욕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840년(헌종 6) 박경가가 빈흥재를 원래의 동재가 있던 자리에 중창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세기에서 20세기 초의 향교 건물 구성을 보면, 뒤편에 대성전이 있고 동·서무는 별도로 갖추지 않았다. 대성전 앞에는 명륜당과 동·서재가 있었는데, 동재는 빈흥재, 서재는 이정재였으며, 고사가 그 북쪽에, 행단은 그 동쪽에 있었다. 이 시기 향교는 제향 공간인 대성전을 뒤에 배치하고, 동·서무는 없었으며, 같은 축선 상에 강학 공간인 명륜당을 앞에 두고 그 좌우에 동·서재를 배치한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고 있었다.

이 당시 동·서무와 누각은 건립되지 않았는데, 이는 고령이 현감 고을이었기 때문이었다. 1917년 고령의 유림들이 모임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민가의 재실을 매입하여 서무의 자리에 이건하고, 동시에 동무를 건립하였다. 즉, 원래 동재였던 빈흥재가 철거되자 동재의 자리에 위치시키지 않고, 향교의 격식을 갖추기 위해 서무의 자리에 빈흥재를 옮겨지었다. 이렇게 하여 1917년경 고령향교는 동·서무가 새로 생기고, 동·서재가 없어지는 공간 구성의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1990년에는 원래 서무였던 빈흥재 자리에 서무를 건립하고, 빈흥재는 그 옆에 별도로 자리하였다.

항교의 배향은 소설위라 하여, 대성전에 5성의 위패를 배치하고 그 좌우에 송조 4현, 신라 2현, 고려 2현, 조선 14현 등 공자를 비롯한 27위의 성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주향위에는 공자를 위시하여 배향위로 4성인 안자(晏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등 5성을 배향하였다.

서배위에는 정호(程顥), 주희(朱熹), 설총(薛聰), 정몽주(鄭夢周), 정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彦迪), 김인후(金麟厚), 성혼(成渾), 송시열, 박세채(朴世采) 등 10인이 종향되었다. 동배위에는 주돈이(周敦頤), 정이(程頤), 최치원(崔致遠), 안향(安珦),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송준길(宋浚吉) 등 10인이 종향되었다.

이처럼 현재 고령향교의 공간 구성은 타향교와 마찬가지로 제향 공간, 강학 공간, 지원 공간 등으로 구분된다. 제향 공간은 대성전, 동·서무, 빈흥재, 내삼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학 공간은 명륜당과 외삼문으로 이루어진다. 또 지원 공간으로 관리사와 화장실이 있다.

특히, 고령향교가 갖는 특징은 제향 공간 내에 빈흥재라는 건물을 두고 있다는 점과 동·서무를 두고 동·서재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모두 1900년대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며, 그 이전에는 고을의 등급인 현에 걸맞게 소설위로 동·서무가 없으며, 동·서재가 갖추어진 전통적인 공간 구성 양식을 갖추고 있었다. 현재 고령향교에는 주례목판을 비롯해, 유안 및 향안, 향약안 등의 목판과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다.

[현황]

고령향교는 1990년 8월 7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하고 성현들에 대한 제향 기능만을 담당한다. 제향은 매년 춘추 중월 상정일에 제행하는데 음력 2월 상순과 8월 상순에 하다가, 한때 물자 궁핍으로 연 1회 공자탄신일인 음력 8월 27일에 행하였다. 그러다가 유림들의 의견이 분분하여 다시 종전대로 향사를 올리고 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