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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빈리 객사 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676
한자 快賓里客舍址
영어의미역 Gaeksa Site at Kwaebin-ri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쾌빈리 433-11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동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객사 유적
원건물 건립시기/일시 1493년연표보기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쾌빈리 433-11 지도보기
소유자 고령군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쾌빈리에 있는 조선 전기 객사 유적.

[개설]

1493년(성종 24)에 건립된 조선 전기 객사 유적이다. 객사(客舍)는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한 국가 기관이었다. 객사는 고려 예종인종 이전부터 지어지기 시작하였으며, 고려 후기에 확산되어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거의 모든 지방 읍치에 정착되었다. 객사는 정청(正廳)에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대궐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는 장소이자, 지방 군현에 파견된 사신이나 외국 사신이 오갈 때 머무는 숙박 기관이었다.

고령객사는 일제강점기에 그 현황이 조사된 이후 조선시대 객사의 건축과 성격 등을 논하는 과정에서 간략히 언급되었다. 고령객사 가야관과 인빈각의 건축 구조를 ‘ㄱ’자 평면 배치로 파악하였으며, 객사의 성격 변화를 언급하면서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1503]의 「고령객관기(高靈客館記)」에서 소개되는 정도였다. 또 고령객사는 성천(成川) 동명관(東明館)의 배치와 좌우가 뒤바뀐 구조라는 점이 지적되었다. 최근 고령군에서 공영 주차장을 건립하기 위한 구(舊) 고령경찰서 부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구전되어 오던 고령객사 터가 확인되었다.

[변천]

발굴 조사와 문헌 자료를 토대로 고령객사의 연혁을 살펴보면, 1493년 건립되어 1843년(헌종 9) 중수하였으나, 1909년(순종 3) 기능이 폐지되었고, 1930년대까지 건물이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일제에 의해 고령경찰서가 건립되었으며, 최근에는 쾌빈리 공영 주차장을 조성하였다.

[위치]

국도 26호선을 따라 대구 방향에서 회천교를 지나 대가야읍으로 들어오면 시외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이를 지나 250m 정도 가면 구 고령경찰서 사거리가 나오는데, 이 사거리의 북쪽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대가야읍의 진산인 주산이 동북쪽으로 길게 뻗어내리다가 다시 대가야읍이 위치한 동쪽을 향해 내려오는 가지능선의 중앙부에 위치한 능선이 끝나고 평지가 시작되는 일대에 위치한다. 이곳은 서쪽으로는 주산이 위치하고, 동쪽으로는 낙동강의 지류인 대가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며, 주산대가천 사이에는 소안들, 황새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대가야읍주산의 동쪽 구릉 말단과 대가천 사이에 형성된 축적지 일대에 위치한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고령군에서는 대가야읍 쾌빈리 433-11번지 일원에 공영 주차장을 건립하기 위해 2004년 12월에서 2005년 5월까지 발굴 조사를 하였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객사 터로 구전되어 오던 곳으로, 발굴 조사를 통해 그 유허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발굴 조사는 3,888㎡의 부지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대가야시대의 저습지와 고려시대~조선시대의 담장 3개소, 연못 1개소, 건물지 3개소, 추정 측간 1개소를 비롯해, 구상유구, 폐와무지 등 20여 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도 토기류, 기와, 벽돌, 자기류 등 440여 점이었다.

[현황]

발굴 조사 결과 고령객사 터는 오랫동안 건물의 증·개축과 일제강점기의 시멘트 건물 축조, 6·25전쟁 때의 피폭, 구 고령경찰서 건물의 터파기 공사 등으로 인해 잔존하는 유구의 상태가 양호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중복된 건물지와 함께 출토된 토기편, 청자편, 분청사기편을 비롯한 다량의 백자편과 옹기편은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친 고령객사 터의 흔적들이었다. 객사와 관련된 건물지로는 담장이 3개소, 건물지가 3개소에서 확인되었다.

유물 중 기와의 명문인 ‘고(高),’ 또는 ‘고령(高靈)’은 관아, 또는 향교와 같은 공공건물에서 사용된 것으로 주목된다. 유물들은 대가야시대의 것을 제외하면, 고려시대~일제강점기까지로 편년된다. 이를 통해 이 지역은 고려시대부터 관아 관련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 조사를 통해 조선시대 고령 지역 관아 건물의 일부인 객사 건물지와 담장, 주 출입 통로였던 문루, 정원의 연못 등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확인된 주 건물지가 객사의 정청인 가야관인지, 아니면 좌우 익랑인 인빈각이나 전일헌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동쪽에 진입 계단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청보다는 인빈각일 가능성이 높다. 객사 남쪽의 주 통로에 있는 정면 3칸의 문루는 외삼문으로 보인다. 고령객사의 건립과 관련한 자료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각종 읍지류에서 조위의 기문을 수록해 놓았다. 고문서로는 「가야관중수기초(伽倻館重修記草)」가 중수 때의 사정을 전한다.

고지도로 『해동지도』, 『여지도』, 『지승』 등과 읍지류인 『경상도읍지』, 『영남읍지』, 『영남여지』, 규장각 소장 『지방도』 등에 『고령현지도』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또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유리 원판 사진[1909년 촬영 추정]에는 ‘가야관(伽倻館)’과 ‘인빈각(寅賓閣)’의 흑백사진이 전해온다.

이러한 발굴 조사 성과와 문헌 자료를 토대로 고령객사의 연혁과 건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령객사는 1493년(성종 24) 고령현감 신담(申澹)이 건립하였는데, 정청인 가야관 9칸과 동대청인 인빈각 15칸, 서대청인 전일헌(餞日軒) 15칸 등 대략 50여 칸의 규모였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며, 1843년(헌종 8)에는 고령현감 조병선(趙秉璿)이 가야관 9칸, 인빈각 15칸 등 55칸을 중수하였으며, 폐문루 3칸 등 17칸은 보수하였고, 전일헌 15칸과 고직가(庫直家) 3칸 등 31칸은 새로 건립해 규모가 103칸 정도로 확장되었다.

가야관에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셨으나, 1896년(고종 33)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궐패를 봉안하였다. 1909년에 객사의 기능이 정지되었으며, 이듬해에 폐지되었다. 1930년대 후반에 가야관과 인빈각 등의 건물도 완전히 철거되었다. 고령객사는 가야관을 중심으로 좌우에 인빈각, 전일헌을 ‘П’형으로 배치하였다. 인빈각은 정면 5칸 중 마루 2칸, 온돌 1칸 등 3칸을 정청의 오른쪽에 붙이고, 나머지는 남쪽 앞면으로 나와 있다. 전일헌도 동일한 평면 구조였다.

인빈각의 남쪽에는 3칸의 폐문루가 있고, 횡각 3칸으로 두 건물을 연결시켰다. 아울러 내삼문과 외삼문은 가야관과 일직선상에 배치되었다. 연못은 가야관의 남쪽 정원에 위치했으며, 객사 주위에는 담장을 둘렀다. 가야관은 남향의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이익공 5량가 판대공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인빈각은 서향의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이익공 5량가 판대공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의의와 평가]

고령객사는 15세기 말인 1493년 50여 칸을 건립하였고, 1843년 100여 칸으로 확장되었다. 20세기 초인 1909년에 기능이 폐지되었으며, 1930년대까지는 건물이 유지되었다. 주요 건물은 정청인 가야관과 동·서 대청인 인빈각과 전일헌이었다. 따라서 고령객사는 400여 년 이상 관아의 중심 건물로 유지되다가 조선 왕조와 운명을 함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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