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706
한자 佔畢齋文籍遺品-宗家文書
영어의미역 Writing Set and Old Documents of Gim Jongjik's Head Family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84[개실1길 26]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수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문서
제작시기/일시 1483~1900년연표보기
재질 장지
소장처 선산김씨 문충공파 문중
소장처 주소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84[개실1길 26]
소유자 김병식
문화재 지정번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9호
문화재 지정일 1985년 10월 15일연표보기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에 있는 조선 전기 고문서.

[개설]

점필재 문적 유품 및 종가 문서는 1483년(성종 14)부터 현재까지 선산김씨 문충공파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들이다. 김종직은 1453년(단종 1)에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 5)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462년(세조 8)에 승문원박사로 예문관봉교를 겸하였다. 성종 때에는 경연관(經筵官)이 되었으며, 함양군수, 참교(參校), 선산부사(善山府使)를 지냈고 도승지, 이조참판, 한성부윤, 공조참판(工曹參判), 형조판서,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를 지냈다.

하지만 김종직이 죽은 후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가 일어나면서 생전에 지었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문제가 되어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후에 중종반정 당시 다시 신원되었으며 1689년(숙종 15)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영남 사림파의 종조인 김종직길재의 학풍을 계승한 김숙자의 아들로, 성리학 보급에도 큰 영향력을 끼쳤으며 훈구파와 대응하여 영남 사림파들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이후 정계에 등장한 영남 사림파는 성리학 이념의 현실 적용보다는 사적 이익에만 몰두하는 현실을 목격하고 훈구파와 차별화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등 훈구파가 초래하고 있는 각종 모순된 상황을 비판하였다. 김종직의 학통은 후에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등으로 이어지며 이들 역시 영남학파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점필재 문적 유품 및 종가 문서 중에는 김종직성종 당시 형조판서를 지내면서 조정의 조회(朝會) 때 어전회의 기록 중 일기 형식으로 적은 『당후일기(堂後日記)』와 교지류, 서찰, 분재기, 명문, 호구단자, 점련문기가 있다. 점필재 문적 유품 및 종가 문서는 1985년 10월 15일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9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교지류의 경우 조선 성종 때의 교지가 대부분이며 교·첩지, 녹패(祿牌), 증직·증시(贈諡) 교지, 김종직의 부인과 할머니, 증조할머니의 증직교지(贈職敎旨), 김종직 후손교지 등이 있다. 서찰로는 1468년(세조 14) 김종직 어머니의 서찰과 1470년(성종 1) 김종직 중형의 서찰, 1483년(성종 14) 김종직의 전 부인의 것이 있다.

분재기는 1509년(중종 4) 김종직의 후처 문씨의 허여문기, 1543년(중종 38)과 1544년(중종 39) 김종직 후처 문씨의 자녀 분재문기, 1556년(명종 11) 김종직의 아들 김숭년(金嵩年)의 자녀 분재문기, 1522년(중종 17)에서 1566년(명종 21)까지 김종직의 손자 김유(金維)의 처부 최모(崔某)의 자녀 분재문기, 김종직의 증손 김몽령(金夢齡) 남매의 분재문기 등이 있다.

명문으로는 1505년(연산군 11), 1529년(중종 24)의 전답 매득 문기 등 11건이 있다. 호구단자는 김종직 후처 문씨의 것 외에 26건이 있고, 점련문기로는 1548년 최세충(崔世忠)의 것을 포함하여 10건이 있다. 김종직의 유품은 상아홀(象牙笏), 성종이 하사한 옥연 필옹옥우(畢翁玉友)와 유리주병(琉璃酒甁), 매화연(梅花硯) 등이 있다.

[형태]

교지류는 1466년(세조 12)에서 1709년(숙종 35)까지의 교지가 있으며, 대부분 성종 때의 교지로, 총 46건이다. 대부분의 교지는 크기가 비슷하나 1484년(성종 15)에 받은 「성화이십년십이월십사일교지(成化二十年十二月十四日敎旨)」는 71.6×106.7㎝이며, 1470년(성종 1)에 받은 「성화육년육월초삼일교지(成化六年六月初三日敎旨)」는 77.8×114.0㎝로 다른 교지에 비해 매우 크다.

명문은 총 11건으로 크기가 매우 다양하였다. 가장 작은 것은 「초육일명문(初六日明文)」으로 크기가 22.0×21.0㎝였으며, 가장 큰 명문은 「건륭이십구년갑신이월십오일유학김경중전명문(乾隆二十九年甲申二月十五日幼學金敬中前明文)」으로 54.0×85.0㎝였다.

분재기는 1507년(중종 27)부터 1760년(영조 36)까지 총 40건이 있으며, 1584년(선조 17)에 만들어진 「만력십이년분재기(萬曆十二年分財記)」가 90.0×197.0㎝로 가장 컸다. 호구단자는 총 25건으로 대부분 조선 후기의 것이었다. 이외에 입안, 완문, 서찰, 당후일기 등이 총 13건 있었다.

 

웹사이트 플러그인 제거 작업으로 인하여 플래시 플러그인 기반의 도표, 도면 등의
멀티미디어 콘텐츠 서비스를 잠정 중단합니다.
표준형식으로 변환 및 서비스가 가능한 멀티미디어 데이터는 순차적으로 변환 및 제공 예정입니다.

[구성/내용]

점필재 문적 유품 및 종가 문서의 대부분은 김종직과 관련된 것들이며, 그중 김종직을 영의정으로 추증하는 교지와 그의 본처인 조씨(曺氏)와 후처인 문씨(文氏)를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하는 교지,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린 교지가 있다. 『당후일기』성종김종직이 형조판서를 지낼 당시 지은 것으로 앞뒤가 소실되었으나 유품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호구단자와 분재기는 김종직이 처부모로부터 허여(許與)·별급(別給)을 받은 문기와 후처 문씨의 허여문기가 있다. 특히 문씨의 허여문기는 무오사화 후의 사회상을 보여줌으로써 당시 재산 증여 관계를 파악하는 데 중요하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