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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취헌유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713
한자 挹翠軒遺稿
영어음역 Eupchwiheonyugo
영어의미역 The Remaining Writings of Park Eun
이칭/별칭 『읍취헌집(挹翠軒集)』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집
관련인물 박은|이행|박공량|박유|박무|정두경|오준|조석윤|채유후|박장원|정조|김학안
저자 박은
편자 이행(李荇)|박공량(朴公亮)|박유(朴愈)|박무(朴懋)|정두경(鄭斗卿)|오준(吳竣)|조석윤(趙錫胤)|채유후(蔡裕後)|박장원(朴長遠)|정조|김학안(金學顔)
간행자 이행|남곤|박유|박무|정두경|오준|조석윤|채유후|박장원|유득일|정조|김학안
간행연도/일시 1514년[초간본]|1580년[재간본]|1651년[중간본]1795년[사간본]|1843년[오간본]연표보기연표보기연표보기연표보기연표보기
권수 4권[중간본]|2권[삼간본]|4권[사간본]
책수 1책[중간본]|1책[삼간본]|2책[사간본]
사용활자 목활자(木活字)
가로 19.8㎝
세로 31.5㎝
표제 挹翠軒集
간행처 평안도 순천부
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사간본]
소장처 주소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50[하오개로 323]

[정의]

1795년에 간행된 조선 전기 고령 출신 학자 박은(朴誾)의 시문집.

[개설]

고령 출신의 학자 박은[1479~1504]은 1496년(연산 2) 관직에 나아갔다. 1501년(연산 7) 유자광(柳子光)성준(成俊)의 간사함에 대해 상소를 올렸다가 무고죄로 몰려 파직되었고, 이후 갑자사화(연산 10) 때 동래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의금부에 투옥되어 사형을 당했다. 박은은 중국 강서파의 시풍을 수용하여 일가를 이뤘기에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의 맹주로 일컬어진다. 또한 이행(李荇)·홍언충(洪彦忠)·정희량(鄭希亮)과 함께 연산조의 문장 4걸이라고도 칭한다.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에 수록된 박은의 시는 주로 관직에서 파직된 1501년부터 아내가 죽기 전인 1503년까지의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온갖 고뇌로부터 정신적으로 평화로울 수 있는 현실 초극에의 노력과 주변 인물의 죽음을 통한 인생무상을 노래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초간본은 박은이 죽은 지 3년 뒤인 1514년(중종 9) 친구인 이행박은과 교유하던 여러 친구들에게 흩어져 전해 오던 글을 수집하여 1책으로 엮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고 있다. 그 뒤에 아들 박공량(朴公亮)이 원집에 빠진 글을 수습하여 『천마잠두녹(天磨蠶頭錄)』이라 이름 붙인 것을 1580년(선조 13) 박공량의 조카인 박유(朴愈)와 박무(朴懋)가 ‘별고(別稿)’라 하여 초간본과 합질하여 상·하권으로 간행하였다. 이때 심수경(沈守慶)에게 발문(跋文)을 부탁하여 첨가하였다. 그러나 이후 간행된 간본(刊本)에는 심수경의 발이 있는 ‘별고’가 모두 빠져 있고, 『청분실서목(淸芬室書目)』에는 4권 1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 여부는 불명하다.

1651년(효종 2)에는 정두경(鄭斗卿)·오준(吳竣)·조석윤(趙錫胤)·채유후(蔡裕後)·박장원(朴長遠)이 훼손된 초간본을 다시 간행하기로 하고 전라감사 심택(沈澤)에게 부탁, 전주에서 중간을 하였다. 이 중간본은 4권 1책의 목판본으로, 이행정두경의 서(序)와 묘지명을 권수에 싣고, 권1부터 권3에는 시를, 권4에는 행상(行狀) 등의 문(文)을 실었다. 시는 저작 순으로 배열했으므로 기행시·유람시의 작품이 한 데 모아져 있다.

1709년(숙종 35)에는 유득일(兪得一)이 통제사로 나가는 정홍좌(鄭弘佐)에게 부탁하여 2권 1책의 목판으로 문집을 간행하였다. 이 삼간본은 중간본에 빠진 고율(古律)·절구(絶句)·장(狀)·기(記)·연구(聯句) 등을 첨부했고, 이를 유별(類別)로 편차하여 승문원 관원에게 선사(繕寫)하도록 하고 자양(字樣)을 조금 늘여 판각한 것이다. 권1에는 시를, 권2에는 문을 실었고, 시는 시체별(詩體別)로 묶어서 배열하였다.

현재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판본은 1795년(정조 19) 2책으로 증간된 어제본(御製本)이다. 이 판본은 정조가 직접 증정(增訂)·편차(編次)하여 4권 2책으로 간행하였다. 정조박공량이 편한 『천마잠두녹』 중 문집에서 빠져 있는 것 12수와 『허암집(虛庵集)』에서 2수, 『해동묵적(海東墨蹟)』에서 2수, 『용재집(容齋集)』에서 1수, 『속동문선(續東文選)』에서 1수 등 모두 18수의 시를 증보하여 평안도 순천부로 보내 간행하게 하였다. 이 정조 증정본[사간본]에는 권수에 심환지(沈煥之)가 쓴 정조의 어제서(御製序)와 목록을 싣고, 부록에 초간서(初刊序)·중간서(重刊序) 3편을 실었다.

1843년(헌종 9)에는 김학안(金學顔)이 충렬사(忠烈祠)에 소장되어 있던 삼간본의 완결된 곳을 보완하여 다시 찍었다. 이 오간본은 삼간본에서 권말(卷末)에 편차된 묘지명을 권수에 편차했으며, 김학안의 발문을 권말에 첨부하였다. 그 후 1937년에 경성제국대학에서 4권 1책으로 간행하였다.

[서지적 상황]

본서의 저본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본으로 1795년(정조 19) 정조가 간행한 사간본이다.

[형태]

4권 2책의 목판본이다. 표제는 ‘읍취헌집(挹翠軒集)’이다. 어미는 상이엽화문어미(上二葉花紋魚尾), 광곽은 사주쌍변(四周雙邊)이다. 반곽 크기는 가로 14.7㎝, 세로 21.5㎝이다. 행수는 10행, 한 행의 자수는 20자이다.

[구성/내용]

『읍취헌유고』의 대부분이 한시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에 실린 작품 거의 모두가 교우와의 화답시이다. 본집은 권수에는 1795년 정조가 지은 어제서와 총목(總目), 목록이 실려 있다. 시는 각체별로 묶어 배열했으며, 앞서 간행한 문집에 증보된 작품에는 각각 표시를 하고 출전을 밝히고 있다. 권1에는 부 1편, 사언 1수, 오언 고시 41수가 실려 있다. 권2에는 칠언 고시 26수, 오언 절구 6수, 칠언 절구 33수가 실려 있다.

권3에는 오언 율시 54수, 칠언 율시 61수, 그리고 연구가 실려 있는데, 연구는 1502년에 이행·남곤·이영원 등과 천두(蚕頭)를 유람할 때 함께 지은 글이다. 권4에는 기 1편, 제문 1편, 행상 4편이 실려 있다. 기와 제문은 김인로(金仁老)에 대한 것이며, 행장은 박수림(朴秀林), 조모 한씨(韓氏), 부인 신씨(申氏)와 안호(安瑚)에 대한 것이다. 부록에는 1509년에 이행이 지은 묘지명과 1761년 김원행이 지은 묘표가 실려 있으며, 끝으로 초간시·중간시와 이행·정두경·유득일이 지은 서문 3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행이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읍취헌유고』에 수록된 시는 교우들 사이에 산재해 있던 것을 일일이 수집해 정리한 것으로, 박은이 22세 때부터 26세까지 지은 불과 5년간의 작품이다. 현재 전하는 시가 대부분 교우와 관련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읍취헌유고』 소재의 작품을 유형별로 정리해 보면 화답시가 61수, 기행시 57수, 송별시 10수, 제시 3수, 기타 17수로 화답시와 기행시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기행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여러 교우와 함께 어울리면서 지은 시를 교우들이 소중하게 보관했기 때문이지만, 박은 자신이 23세 때 파직된 후 여러 곳을 유람하면서 그때마다 흥취를 시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박은의 시 작품은 23세 때 억울한 죄목으로 파직된 사건을 계기로 양상이 크게 달라진다. 파직 이전의 작품에서 연산군의 폭정에서 느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살필 수 있다면, 후기 작품에선 정치적 패배 의식에서 비롯된 정신적 방황, 현실 초극에의 노력, 체념, 달관 등의 양상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25세 때 아내 신씨의 죽음을 계기로 또 다른 양상을 보인다. 아내의 죽음 이전 시에서 현실 초극에의 노력을 살필 수 있다면, 이후 시에서는 체념과 달관의 경지를 살필 수 있다. 박은의 시에서 살필 수 있는 ‘웃음’은 각기 자조, 체념, 달관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같은 경향을 시사해 준다.

[의의와 평가]

연산조의 문장 4걸이라고도 칭했던 박은허균(許筠)·신위(申緯)·김만중(金萬重)·홍만종(洪萬宗)·이수광(李睟光) 등 여러 대가들로부터 우리나라 제일의 시인으로 추대되었다. 박은정조가 지적한 바와 같이 ‘당조송격(唐調宋格)’이란 독자적인 시풍을 모색하였다. 박은의 이 같은 시풍은 조선 전기의 송시풍(宋詩風)에서 후기에 이르러 당시풍(唐詩風)으로 변모하는 과도기에서 교량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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