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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783
한자 金南得
영어음역 Gim Namdeuk
이칭/별칭 기지(麒芝),중서(重瑞),충익(忠翊)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위은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상북도 고령군
성별
본관 고령
대표관직 문하평리

[정의]

고려 후기 고령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고령(高靈). 초명은 기지(麒芝), 자는 중서(重瑞). 고령김씨 시조이다. 아들로 공양왕 때 사헌장령(司憲掌令)을 지낸 김무(金畝)를 두었다. 손자로는 김무의 아들인 사복시정(司僕寺正) 김사행(金士行),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김사문(金士文), 승지 김사충(金士忠), 합천군수 김사신(金士信) 등이 있다.

[활동사항]

김남득(金南得)은 1340년(충혜왕 복위즉위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공민왕 때에 감찰집의(監察執義), 양광도안렴사(楊廣道安廉使)를 역임하였다. 공양왕 때에는 서해도관찰사(西海道觀察使)로서 왜구를 격퇴하여 벼슬이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렀다. 1390년(공양왕 2) 밀직제학(密直提學) 이지(李至)와 함께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2년(공양왕 4)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로 있을 때 정몽주 당으로 지목되어 정몽주가 제거될 때 유배되었다.

1370년(공민왕 19) 상주목사로 있을 때 관아동 쪽에 정자를 하나 세웠는데, 이색이 풍영루(風詠樓)라 명명하여 기(記)를 지었으며, 이숭인도 시를 남기면서 훗날 명승지가 되었다. 원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가서 예부상서(禮部尙書)를 명받고 환국하였다.

[묘소]

묘소는 고령군 쌍림면에 있다.

[상훈과 추모]

원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온 공을 살펴 왕이 익대공신(翊戴功臣)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하고 ‘득어영남지의(得於嶺南之意)’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그리하여 이름을 ‘김남득(金南得)’으로 하였다고 한다. 시호는 충익(忠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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