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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908
한자 强首
영어음역 Gang Su
이칭/별칭 우두(牛頭),임생(任生)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이형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유학자|문장가
성별
몰년 692년연표보기

[정의]

통일신라의 유학자이자 문장가이며 문신.

[가계]

강수의 아버지는 나마(奈麻)를 지낸 석체(昔諦)이다. 강수의 조상은 본래 대가야 출신이었으나 550년 이후 신라 중원경(中原京, 지금의 충주)으로 사민이 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이곳에서 유력한 세력으로 계속 지위를 유지한 것으로 여겨진다.

[활동사항]

어머니가 꿈에 뿔 달린 사람을 보고 잉태하였는데, 강수(强首)가 태어나니 머리 뒤편에 뼈가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석체가 어진 사람을 찾아 물으니 “머리 위의 사마귀는 나쁠 것이 없고 기이한 것이다”라는 답을 듣고 어머니에게 사정을 말하고 잘 길러 나라의 재목이 되게 하자고 하였다.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 책을 읽을 줄 알아 의리에 통달하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불교와 유교 중 무엇을 배우겠느냐 물었을 때 “불교가 세속을 도외시한 가르침인데 어찌 배우겠느냐”라고 반문한 기록을 보면 6세기 들어 유학이 시대적 필요성에 의해 정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열왕 즉위 이후 당이 보낸 조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을 때 강수가 막힘없이 해석하였다고 전한다. 이때 무열왕이 그의 이름을 묻자 ‘임나가량인’으로 ‘우두(牛頭)’라 하자, 왕은 “그대의 머리뼈를 보니 과연 강수선생(强首先生)이라 할 만하다”라면서 당에 보내는 답서를 쓰게 하였다고 한다. 이후부터 강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임생(任生)’이라고만 부르며 우대하였다고 한다.

660년 나당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를 공격하는 데 외교 문서의 작성을 통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문무왕 대 들어서도 이 방면에 큰 공을 세워 사찬(沙湌)의 관등에 올랐다. 신문왕강수가 세상을 떠나자 국가에서 장례비를 지급할 만큼 우대하였다.

[학문과 사상]

강수는 통일신라에서 유학의 산실로 기능한 국학(國學)을 설치하고 관료를 양성하는 데 큰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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