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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947
한자 郭大淵
영어음역 Gwak Daeyeon
이칭/별칭 곽윤(郭奫),겸와(謙窩)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윤정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상남도 거창군 다곡면 다전리
성별
생년 1881년연표보기
몰년 1927년연표보기
본관 현풍

[정의]

일제강점기 고령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곽대연(郭大淵)[1881~1927]은 본관이 현풍(玄風)으로, 본명은 곽윤(郭奫)이며 호는 겸와(謙窩)이다. 대연은 자(字)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다곡면 다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곽정석(郭廷錫)이며, 대한제국 말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조카이다.

[활동사항]

곽대연은 8세 때부터 숙부인 곽종석에게 글을 배웠는데, 숙부는 직접 손으로 『몽어(蒙語)』라는 책을 써서 가르쳤다. 14세 때 부친상을 당해 예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어른 같다”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14세 때 곽종석이 잠시 머물고 있던 화산(花山)으로 가서 『소학(小學)』 등을 배우고, 16세 때 다시 숙부를 따라 거창 다전(茶田)으로 옮겨가 평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거창 다전에서는 숙부를 곁에서 모시면서 찾아오는 석학과 제자들을 뒷바라지하고, 자신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곽종석은 조카의 일처리에 항상 만족해하였으며, 학문에 부지런히 힘쓰는 모습을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한다. 곽대연은 동문들과 학문을 강론할 때도 항상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았는데, 그런 연유로 자신의 호를 ‘겸(謙)’자를 써서 ‘겸와’로 정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확대되던 때, 민족 대표에 유림계(儒林界)가 빠진 것을 통분해하며 김창숙(金昌淑)·이중업(李中業)·김정호(金丁鎬)·권상도(權相道)·장석영(張錫英) 등과 함께 137명이 서명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인 장서(長書)를 작성하였다. 장서 우송의 성공과 차후의 사태를 준비하기 위해 서명하지 않은 다수의 유학자가 있는데, 곽대연을 비롯하여 김창숙·성태영·유진태·임경호·이중업·김광(金洸)·윤충하(尹忠夏) 등 22명이 그들이다. 이때 곽대연은 와병 중인 곽종석을 대신하여 서울을 왕래하며 독립청원서를 처음부터 모사하였으며, 독립청원서를 정서하기도 하였다.

장서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남 유학자들과 곽종석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림 대표 137명이 연서(連署) 날인한 뒤 인쇄하여 각도 향교 등에도 배포하였다. 원본은 김창숙이 같은 해 3월 말 가지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김규식으로 하여금 프랑스 파리로 가져가게 하였다.

파리장서사건은 경상북도 성주의 만세 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면서 발각되었고, 5월 초 장서 서명자의 아들인 하홍달(河洪達)이 만세 시위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면서 독립청원서의 일부가 탄로 나고 인근의 서명자와 연락 책임자들이 검거되었다. 그리고 상하이[上海]에서 우송된 장서가 전국 각지의 향교에 도착하면서 유림 인사 500여 명이 고초를 당하였다. 이것이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이로 말미암아 침체되었던 유림계는 대한제국 말 구국을 위한 척사 운동과 의병 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김창숙은 다시 독립운동 기지 건설 시도와 자금 모집 활동에 나섰다. 1925년 8월 김창숙은 경기, 충청, 경상 지역에서 유림과 부호를 대상으로 모금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국내로 몰래 들어왔다. 그리고 3·1운동 당시 뜻을 같이하였던 유림 인사들이 곽종석의 문집 출간을 위해 서울에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김화식을 보내 곽대연과 접촉하였다. 이때 곽대연은 문집 출판 비용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금으로 앞장서서 지원을 하고 혼자 뒷수습을 하였다. 뒤에 다시 문집 간행 때 문집 7권을 헌병에게 탈취당하여 발행을 하지 못하다가 1933년 동문인 김황의 주선으로 문집 발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유학자 최인찬은 곽대연에 대해 “유년부터 임종 때까지 면우 선생을 곁에서 모셨으며 평생을 선생의 강도(講道)에 헌신한 학자이다. 왜경의 감시와 압박은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일제는 선생 때문에 거창에 헌병대를 설치하고 사소한 일이라도 발생하면 선생 대신 공을 체포 구금하였다. 전국에서 모여든 수많은 영재를 위하여 안심하고 학업을 닦게끔 주선한 분이 또한 공이다. 감자를 심고 도토리를 주어 숙식을 제공한 이도 공이었다. 그러므로 면우 선생을 찾아온 명망 있는 학자와 애국자치고 공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이가 거의 없다”라고 말하였다.

한편 국내에서 자금 조달에 실패한 김창숙은 1926년 다시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고, 이동녕·김구·김원봉(金元鳳) 등과 상의하여 1차로 의열단(義烈團)의 나석주(羅錫疇)를 파견하여 1926년 12월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를 폭파하도록 하면서 국내에서 모금한 자금을 건넸다. 국내의 유림들도 그에 부응하여 모금 운동을 벌였고, 이와 연관하여 600여 명의 유림이 투옥되는 제2차 유림단 사건이 발생하였다.

곽대연면우 선생 문집을 발간하고 난 2년 뒤인 1927년 향년 47세로 거창 다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강우 지역 유림들은 곽대연을 두고 “면우 선생이 봉황이라면 겸와는 난새와 같다”라는 말로 두 사람의 학덕을 길이 전하고 있다.

[저술 및 작품]

『겸와유고(謙窩遺藁)』가 전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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