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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교육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1276
한자 近代敎育
영어의미역 Modern Education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일수

[정의]

구한말에서 해방 이전까지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서 이루어진 근대식 교육.

[개설]

근대교육은 근대 국가의 성립이나 자본주의 사회의 발생과 더불어 시작된 교육으로 주로 계몽사조를 기초로 나타난 계몽주의 교육을 의미한다. 한국의 경우 근대교육은 한국의 근대를 어떻게 시기 구분하느냐에 따라 다소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 본격적인 개항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1880년대부터 1945년 해방까지 각종 근대식 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육을 의미한다.

[한국의 근대교육]

한국의 근대교육이란 서양 제국주의 세력이 침투해 들어 올 때 우리 나름대로의 생존을 모색하는 전략의 일환으로 새로운 교육을 도입하고 실천한 교육을 말한다. 근대에 대한 기본 전략은 갑오개혁 정권과 이후 광무개혁을 추진한 대한제국에서 제시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라 할 수 있다. 곧 우리 고유의 정신문화를 바탕으로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따라서 근대교육은 서양의 과학, 기술문명을 배우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갑오개혁 이후 근대적 교육 행정 기구인 학무아문이 설치되고 각종 근대적 교육 기관의 관제(官制)가 마련되었으며, 신식 학교로서 관립 외국어 학교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근대교육을 담당할 교육자 양성의 경우 통감부 시기에는 주로 관립 한성사범학교에서 담당하였다. 1905년부터 1910년에 이르는 시기는 계몽운동의 핵심 활동인 교육 활동과 산업 진흥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된 때로서 대한제국과 지방 행정 기관이 주도적으로 학교 설립에 나섰고, 여기에 대한협회 등의 계몽운동 단체들이 관민 합동으로 학교 설립과 교육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편, 근대교육은 조선의 세계열강과의 교섭에서, 또는 세계열강의 한반도 침탈 과정에서도 이루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즉 우리나라에서의 근대교육은 기독교의 수용 과정에서 선교사의 주요 활동이었던 학교와 병원의 설립을 통해서도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민족적 성향을 지닌 사립학교에 대한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1908년 8월에 실시된 사립학교령이 그 시초였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제는 식민지 교육 정책을 실시하면서, 그 기조로 민족 동화 정책을 펼쳤다.

식민지에 대한 교육 정책도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신도 사상을 내세운 국가주의적 성격을 띠었고, 중앙 집권적 교육 행정 제도를 채택해 감시와 관리를 철저히 하였다. 또한 우리 민족의 글과 역사 대신 일본어와 일본 역사를 가르치는 제국주의 중심의 교육을 실시하였고, 교육 제도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학교를 각각 다른 제도로 병립시키면서 일본인에게 집중적으로 혜택이 주어지는 방식으로 운영하였다.

식민지로의 전락과 더불어 일제에 의해 근대교육이 전망과 방향이 잃게 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한 야학과 사립학교 등을 통한 교육 활동이 펼쳐졌고, 이 활동은 민족운동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이러한 학교는 근대교육이 이루어지는 현장이자 향후 민족운동의 주도 세력이 형성되는 공간이었다. 이처럼 근대교육의 장은 우리 민족의 생존 전략 수립과 일제의 한국 지배 정책이 충돌하던 현장이었다.

[고령의 근대교육]

고령의 근대교육은 계몽운동 시기에 관민 합동으로 추진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한 공교육과 지역 시민운동 차원의 민족 교육이 실시되었다. 계몽운동 시기인 1906년 7월 12일 고령에서는 당시 고령군수 윤하영의 주창과 지역 유지의 협력으로 근대식 교육 기관인 고령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1907년에는 개진면 소재 개진교회가 민간 차원에서 개포학교를 열어 근대식 교육을 실시하였다.

3·1운동 이후에 일제가 문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학교 증설을 교육 정책으로 내세웠다. 이에 고령군에서도 식민지 공교육 제도의 구도 아래 학교의 설립이 이루어졌다. 1922년 성산공립보통학교, 1925년 쌍림공립보통학교, 1928년에 다산공립보통학교 등이 차례로 설립되었다. 또한 일제에 의해 농촌 진흥 운동이 펼쳐지던 1932년에는 개진보통학교가, 1933년에는 우곡보통학교가 차례로 개교하였다. 그리고 1933년에 안림간이학교, 1937년에 저전간이학교, 1939년에 직동간이학교, 1940년에 예동간이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교육 정책으로는 당시 고령군의 교육 수요를 충분히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일제 관 주도 교육의 부족분을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필연적으로 발생하였다. 이에 당시 고령 지역 유지와 신학문을 배운 청년들로 구성된 고령청년회가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고령청년회는 턱없이 부족한 교육 기관과 높은 교육열에 대응하여 야학, 노동 야학, 여자 야학 등과 강습소를 운영하면서 근대교육과 민족교육을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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