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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B010105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동락

[5대에 걸쳐 효를 실천하다]

개실마을김종직의 7세손인 김시사(金是泗) 이하 5대에 걸쳐 효를 실천한 것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마을 입구의 비석공원에 있는 ‘오세효행사적비’와 화산재의 ‘일선김씨 오세효행사적비’, ‘잉어뱅 전설지’ 등은 효와 관련된 전설이 깃든 소위 ‘전설의 고향’이다.

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사람의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입신행도양명어후세 이현부모 효지종(立身行道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몸을 세워 도를 행하고 후세에 이름을 날림으로써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의 끝이다)

『효경(孝經)』의 첫 장에 실린 공자가 증자에게 한 유명한 이야기로, 오늘날 효를 논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구절이다. 뒤이어 공자는 “무릇 효는 부모를 섬기는 데서 시작하여 임금을 섬기는 과정을 거쳐 몸을 세우는 것으로 끝이 난다.”고 말하였다. 공자는 부모에 대한 효도에서 시작하여 임금을 섬기는 충으로 확장되는 것으로 파악하여, 충과 효가 서로 구별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굳이 공자의 가르침을 들지 않더라도 조선은 가정에서의 효열(孝烈)과 국가에 대한 충을 매우 강조했다. 효열을 통해 성리학적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 기강을 강화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특히, 효는 양반 사대부가 지녀야 할 기본적인 소양이자 도리였다. 하지만 아무리 효를 강조한 조선 시대이긴 하지만, 한두 세대도 아닌 무려 5대 동안 효자를 배출하기는 쉽지 않았던 듯하다. 그 때문에 ‘오세효행사적비‘에는 “하늘이 오세의 효를 김씨 한 문중에 내려준 것은 어찌 그렇게 후하게 한 것인가?”라고 감탄하고 있다.

이처럼 개실마을의 선산김씨[일선김씨] 가문에서 5대 동안 효자를 배출한 배경은 아마도 점필재 김종직에서 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종직은 조선 사회를 성리학적인 이념과 도덕으로 무장한 사림들이 주도하는 사림 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특히, 그는 「이존록(彛尊錄)」을 찬술하여 선대의 세계(世系)를 정리함으로써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점필재 이후 선산김씨 가문은 효(孝)를 중시하는 가풍이 형성되어 후대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김종직의 7세손인 김시사(金是泗)에서 김선명(金善鳴)-김문정(金文丁)-김경복(金敬福)-김치정(金致精)의 5대에 걸쳐 이어지는 효로서 활짝 꽃피게 되었다.

[하늘도 감동한 효성]

매암(梅庵) 김시사는 9세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해 표주박과 숟가락을 1개씩 벽에 걸어 두고 물마시고 죽 먹는 용도로만 사용했다. 또 어머니가 병이 들자 종기를 입으로 빨아서 병을 낳게 하고, 여섯 달 동안 화롯불에 약을 달이면서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한다. 끝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자신도 병이 들어 결국 죽고 말았다. 이 효행이 알려져 조정에서 지평(持平)의 벼슬을 증직하였다. 한편,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와 『영남읍지(嶺南邑誌)』 등에 수록된 『고령현읍지』에는 김종직의 7세 주손인 김시락(金是洛)김시사의 효행이 실려 있다. 김시락은 효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이 되고, 다시 승진하여 봉사가 되었는데, 효우(孝友)로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김시사에 대해서는 9세 때 아버지 상을 당해 곡을 하는 것이 어른과 같았다고 소개하고 있다.

연한당(燕閒堂) 김선명은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섬겼는데, 급한 일이 아니면 집을 떠나지 않고 항상 가까이에서 모셨다고 한다. 상을 당해서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매일 묘소에 올라가 절을 하니 무릎을 꿇은 곳에서는 풀이 자라지 못하였다. 나이가 들어서는 집의 현판을 모헌(慕軒)이라 하고, 죽을 때까지 부모님을 사모했다고 한다.

죽헌(竹軒) 김문정의 경우, 어머니가 병환 중에 꿩고기 산적을 먹고 싶다고 하자 꿩이 스스로 주방으로 날아들었고, 잉어회를 먹고 싶어 하자 잉어가 갑자기 작은 뱅[못]에서 뛰어 나왔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이 그 못을 이출지(鯉出池)라고 하였다. 현재 마을 옆에 있는 ‘잉어뱅 전설지’가 바로 그곳이다.

또 김문정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묘소 옆에 여막을 치고 3년간 죽만 먹었고, 상기를 마쳤으나 매일 묘를 찾아 저절로 오솔길이 생겼다. 이에 풀 베는 초동이나 나무하는 목동들이 그 오솔길은 ‘효자의 길’이니 감히 밟을 수 없다고 하면서 다른 길로 다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김경복은 어릴 때 아버지가 병이 들어 손수 약을 달였는데, 그의 나이가 어리므로 집안 어른이 다른 사람에게 대신 맡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김경복은 이에 따르지 않으면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학문이다. 학문을 하고서도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학문을 익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는 어머니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해 5일을 더 연명케 했다고 한다.

지수(芝受) 김치정은 아버지가 병이 들자 대변을 맛보아 병환을 치료했으나, 끝내 상을 당하자 여막을 치고 시묘를 하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여막으로 꿩과 기러기가 날아들므로 이에 관청에서 쌀을 내렸으나 사양했다고 한다.

이상에서처럼 개실마을의 5대에 걸친 효성은 사람뿐만 아니라 하늘도 감동시켜 잉어와 꿩, 기러기 등 미물들마저 저절로 날아들어 효성에 감응하는 이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근래에 사회 지도층이나 부유층에서 돈이나 집안 문제로 부모를 올바르게 섬기지 않는 패륜에 대한 기사를 종종 접하게 된다. 시대가 변하면서 효의 기준이 달라질 수는 있다. 하지만 부모가 물려 준 신체를 소중히 여겨 부모의 근심을 없게 하고, 입신양명하여 부모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효도의 근본이라는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겠다.

개실마을 출신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선조들의 효와 관련된 전설이 깃든 연못과 비석들을 보고 자라났다. 그 때문인지 지금도 이 마을에는 효자, 효부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다. 최근에 점필재 종손의 아들이 부모님이 연로해지자 가까이서 봉양하기 위해 다니던 회사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야기도 그 중의 하나일 듯하다. “효자 집에 효자 난다.”는 옛말은 세월이 변한 21세기의 개실마을에서는 아직도 불변하는 진리로 통하고 있었다.

[참고문헌]
  • 개실마을(http://www.gaes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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