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C010204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동락

개진면을 지나 지방도 67호선을 따라 진입하면 왼쪽으로 모듬내[회천] 변을 따라 길게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고령박씨들이 650년간 터를 일구고 충과 효를 실천하면서 살아 온 도진마을이다.

마을로 접어들기 직전의 도로 변 왼쪽에 있는 문연서원 유허지에는 ‘문연서원 유허비’를 비롯해 5기의 비석이 건립되어 있다. 이곳을 지나면 버스 정류장이 있고, 그 옆에 도진충효마을 지정비와 화직간(華職竿) 표지석이 서 있다. 그 맞은편으로는 도진리에서 야정리속리 등으로 건너가는 도진교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

이 다리는 도진리에서 진행된 새마을 운동의 첫 번째 사업으로 1973년에 전체 길이 300m로 준공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도진교 좌측에 도진교 준공 공덕비를 1974년 12월에 세웠다. 현재의 도진교는 총 길이 315m로 1995년 7월 15일 준공되었다.

도진교가 개설되기 전에는 이곳에 도진나루가 있어 배로 회천을 건너 다녔다고 한다.

[도로를 중심으로 마을이 구분되다]

도진교가 있는 도로 변에서 보면 도진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도진리는 전체적으로 대장산의 지맥이 모듬내[회천]와 만나는 산기슭에 북에서 남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마을 앞으로 지방도 67호선이 지나간다.

마을로 진입하는 마을 도로는 크게 마을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도진1길에서 도진4길 등 네 개의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도로의 좌우에 가옥들이 들어서 있다.

먼저 도진1길은 화직간과 우곡면 노인회관, 우곡보건지소에서 죽연정사(竹淵精舍)가 있는 골안까지 이어진다.

도진1길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을 웃마[일명 윗마을]라고 부른다. 대장산의 산기슭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다음으로 도진2길은 마을 앞 삼거리에서 도진충효관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도진2길과 도진1길 사이의 마을은 중땀이라고 한다. 웃마와 아랫마의 중간에 있는 마을이란 의미다. 중땀은 대장산 산기슭에 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도진3길 은 마을 앞 삼거리에서 우곡면사무소를 지나 MTB 도로로 연결된다. 도진3길의 좌우측에 위치한 마을을 아랫마[일명 아랫마을]라고 한다. 우곡면사무소 등이 위치해 도진리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기도 하다.

도진4길 은 우곡면사무소에서 우곡초등학교 도진분교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은 도진리의 가장 남쪽에 있는 새마[일명 새마을]와 연결된다. 새마는 1910년대 고령박씨의 외손인 남양홍씨가 개척한 마을이라고 한다.

[재실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지파(支派)의 후손들]

도진리고령박씨 소윤공파는 박경(朴景)의 5세손인 박윤(朴潤)의 죽연파(竹淵派)[일명 장파], 셋째 아들 박택(朴澤)의 낙락당파(樂樂堂派)[일명 숙파], 둘째 아들 박일(朴溢)의 양자 박정번(朴廷番)의 학암파(鶴巖派)[일명 중파] 등 3개 파로 분파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들 분파들은 각각 파조를 모시는 재사를 건립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분파의 후손들이 모여살고 있다. 즉, 웃마를 중심으로 장파인 죽연파가, 중땀을 중심으로 숙파인 낙락당파가, 아랫마를 중심으로 중파인 학암파가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2010년 현재 도진리에는 106호가 거주하는데, 고령박씨는 89호 정도이다. 그 중 장파가 29가구, 중파가 45가구, 숙파가 15가구 정도 된다고 한다. 중파의 족세(族勢)가 가장 번성한 편이다.

고령박씨가 처음 마을을 이룬 곳이 웃마였다. 즉, 도진1길 가장 안쪽의 골짜기인 안골을 중심으로 대장산 자락에 현재보다 약간 지대가 높은 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곳은 임진왜란 전인 1540년(중종 35)대까지만 하더라도 100여 칸 이상의 기와집이 즐비할 만큼 번성했던 곳이나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 때 가토 기요마사[嘉藤晴靖]가 이끈 왜군(倭軍)이 마을로 들어와 가옥들을 전소시켰다고 한다.

이후 1605년(선조 38)경에 박윤의 손자인 박원갑(朴元甲) 대에 현 종가의 사당 뒤편에 종가를 재건했다고 한다. 그 후 몇 차례 중건을 거쳐 현재의 종가와 사당은 1800년대 중반에 중건하였다.

모현정(慕賢亭) 은 우곡면 노인회관과 우곡보건지소 옆에 위치하고 있다.

모현정에서는 1868년(고종 5) 문연서원이 훼철되자 서원에서 모시던 오현(박윤, 박택, 윤규, 박정번, 최여설)의 위패를 모셨다. 윤씨와 최씨 등도 함께 참여하기는 하지만 모현정은 도진리에 정착한 고령박씨 3개 지파의 공동 사당인 셈이다.

죽연정사(竹淵精舍)는 웃마의 가장 안쪽 편인 골안에 위치하고 있다. 죽연정박윤이 1540년 마을 입구 현 노인회관 부근에 건립한 누각이었다.

죽연정남명(南冥) 조식(曺植)낙천(洛川) 배신(裵紳),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 월오(月塢) 윤규(尹奎) 등이 찾아와 도의(道義)를 다지고 시를 읊기도 하던 고령 최초의 정자였다고 한다. 이후 1880년(고종 17)에 무너진 것을 다시 중수하면서 죽연정사라 하였다.

1920년 경자년 대홍수로 무너졌으나 1939년 현재의 자리에 새로 건립하였다. 죽연정사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 건물이다.

다음으로 골안에는 낙락당파[일명 숙파]의 재실인 낙락당이 건립되어 있다. 낙락당은 골안의 죽연정사 맞은편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1567년(명종 22) 낙락당 박택을 추모하여 세웠으나 이후 소실된 것을 1940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마지막으로 아랫마에는 남고정(南皐亭)과 경매정(景梅亭)이 자리 잡고 있다. 남고정우곡면사무소 동편에 위치한다.

학암 박정번의 손자인 남고 박응형(朴應衡)의 학문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개축한 정사이다. 원래 박응형이 죽은 후인 1660년(현종 1)경에 현재의 남와구거 뒤편에 건립했으나 퇴락해지자, 1939년부터 남와구거의 사랑채를 남고정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1973년 현 위치에 남고정을 새로 지었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입구에는 솟을대문이 있다.

경매정은 아랫마의 뒤편에 위치해 있다. 박정번의 아들인 매헌(梅軒) 박효선(朴孝先)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1956년 건립하였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이상에서처럼 도진리는 웃마의 죽연 종택과 골안의 죽연정사·낙락당, 아랫마의 남고정과 경매정 등 3개 지파의 재실들이 건립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재실을 중심으로 지파의 후손들이 모여 살면서 각 파조에 대한 향사를 매개로 문중의 결속을 다져 나가고 있다.

[정보제공]

  • •  박돈헌(1948년생, 우곡면 도진리 주민, 도진충효관 관장)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