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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C030106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경용

[동부전선을 지키다]

도진리 입향조(朴景)의 27세손인 박수헌(朴壽憲) 씨는 1923년 아버지 박경점 씨와 어머니 김필숙 씨 사이에서 4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박수헌 씨는 육군사관학교 7기생으로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대구국방경비대에서 근무했다. 고향을 지켜 왔던 박수헌 씨의 형 박성헌[작고] 씨는 살아생전 그를 회고하며, “성격이 활달하고 대쪽같이 곧으며 키가 190㎝나 되는 걸출한 군인이었다.”고 말했다.

박수헌 씨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육군 중위로 참전하여 경상북도 울진과 병곡, 영덕, 포항 등 동부전선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백척간두의 조국을 지켜 냈다.

박수헌 씨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는 빗발치는 포화 속에서도 90일간의 전선 일지를 남겼는데, 이것은 ‘피의 흔적’이란 의미의 『혈적(血蹟)』이란 제목으로 묶여졌다. 또박또박한 육필로 써내려 간 60여 쪽의 전선 일지 속에는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부터 시작하여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이 11매의 상세한 작전 지도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6·25전쟁 개전 초기 90일간의 기록]

『혈적』은 40년 동안 도진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박수헌 씨의 형이 장롱 속에 고이 보관해 온 것으로, 1990년 6월 25일부터 29일까지 『매일신문』을 통해 5회로 나뉘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다음은 남진하는 인민군 주력 부대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전하며 겪은 전선 일지의 일부 내용이다.

• 전쟁의 서막

1950년 6월 25일. 약간 후텁지근한 일요일 아침은 어느 때와 같이 조용했다. 부산 356부대에 배치된 나는 1주일 동안 비상근무로 쌓였던 피로를 풀려고 초량동 하숙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충 얼굴을 훔친 후 막 이부자리에 눕자, 갑자기 시내 곳곳에서 사이렌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나왔다. ……오후 5시 명령이 떨어졌다. 굳은 얼굴로 앞으로 닥쳐 올 전투 상황을 얘기하며 우리들은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우람한 기적 소리를 울리며 울산과 경주를 거쳐 포항으로 향했다. ……[이하 중략]

• 첫 전투의 대승

전투는 초반부터 치열했다. 적의 첨병 중대가 해변의 연안 도로를 따라 남하하던 중[현 울진군 근남면 -필자 주] 노음리에서 아군과 맞닥뜨린 것이다. 일발의 총성과 함께 사격 명령이 떨어지자 전투는 불을 튀겼다. 대원들은 그동안 한시도 놓지 못하고 마음을 조여 왔다. 소총, 기관총, 박격포 등이 발사되었다. 이때가 새벽 5시. 날은 훤히 밝아 오고 기습을 받은 적병은 우왕좌왕 대열을 흩트리며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아수라장 같은 전쟁터는 비명, 포성, 총성 등이 한데 어울려 그야말로 연옥이었다.……[이하 중략]

• 완전 포위당하다

……이튿날인 [7월 -필자 주] 20일 새벽 4시, 우리들은 적으로부터 완전히 포위됐음을 알았다. 오후 3시까지 간헐적으로 전투를 펴면서 필사의 탈출 작전을 폈다. 금곡리(金谷里) 서쪽 약 1.5㎞ 지점에 도착한 우리들에게 이미 적군이 전방 108고지를 점령하고 맹렬히 사격을 가해 왔다. 상황은 점차 불리해져 갔다. 워낙 수적으로 열세였다. 우리들은 금곡리를 거쳐 해변으로 밀렸다. 너무 적에게 노출된 것이다. 이를 악물고 포위망을 뚫으며 북진, 고지를 점령해야만 했다.……[이하 중략]

• 후퇴

……부상당한 사병들의 신음 소리가 뱃전을 두드리는 파도 소리와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새벽 1시. ……적의 조명탄은 계속 하늘을 덮었다. 논에는 푸른 벼가 15㎝ 가량 자라 있었다. 파괴된 교량을 지나 마을을 지나도 인기척은 찾을 수 없었다. 첨병 2명을 차출, 전방에 내보낸 후 남쪽으로 하염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꼬박 네 끼를 걸렀으니 배와 등이 맞붙는 것 같았다. ……[이하 중략]

[부상]

……총구를 적을 향해 잡고는 “같은 민족끼리 싸울 게 뭐냐”고 고함지르며, 칼빈에 꽂혀 있는 혼용 예광탄 15발을 쏘면서 전진했다. 3명의 적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적 지휘관이다” 하는 소리와 함께 체코식 기관총을 나를 향해 쏘아 댔다. 갑자기 뜨거운 감을 복부와 발에서 느끼면서 주저앉고 말았다. 웬일인지 기분이 좋았다. 얼굴에는 빙그레 웃음이 떠올랐다. 이게 웬일일까. 내 자신이 부상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순간 살아야겠다는 삶에 대한 욕심과 애착심이 전신으로 퍼졌다. 무조건 숲 속으로 굴렀다. 아~ 아~ 하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쓰러졌다. ……[이하 하략]

[도진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현대까지 이어 온 충(忠)의 본보기]

종전 후 박수헌 씨는 중령으로 진급하지만, 전장에서 당한 관통상의 후유증으로 5년 만에 끝내 생을 마감했다. 박수헌 씨의 이러한 행적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일어났던 도진 사람들의 나라 사랑하는 정신이 현대에까지 이어 온 충(忠)의 본보기이다. 박수헌 씨는 사후 육군 대령으로 추서되었다. 6·25 전선 일지 『혈적』의 원본은 도진충효관에 무공 훈장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정보제공]

  • •  박돈헌(남, 1948년생, 우곡면 도진리 주민, 도진충효관 관장)
  • •  박영환(남, 1962년생, 경찰공무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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