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008 |
---|---|
한자 | 加倻魂樂聖于勒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가야 |
집필자 | 하창환 |
[개설]
5세기 중반 이후 가야 연맹의 침체기 속에서 서서히 새로운 강자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현재의 고령 지역에 위치한 반로국(半路國)이었는데, 그 성장의 계기는 가야산 아래 야로현(冶爐縣)의 철광 개발이었다. 이미 한 말의 씨앗을 뿌리면 그 100배가 넘는 수확을 거두어들이는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완만하게 성장해 오던 반로국의 입장에서 철을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농업 생산력의 향상뿐만 아니라, 강력한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철제 무기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력과 무력을 함께 갖춘 반로국은 스스로를 대가야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자신들이 가야 연맹 중의 한 나라가 아니라 그 맹주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었다.
대가야는 이러한 자신감으로 그 동안 신라와 백제에 막혀 있던 중국과의 교류를 이루어 내었다. 479년 대가야의 하지왕은 남제(南齊)로 사신을 보내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라는 품계를 얻었다. 이로써 대가야는 국제 사회에 그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가실왕, 우륵을 만나다]
하지왕이 이루어 놓은 토대 위에 그 뒤를 잇는 가실왕은 더 큰 꿈을 키워 나갔다. 어느 날, 가실왕은 금곡(琴谷)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우륵을 궁중으로 불렀다.
“얼마 전 중국으로부터 쟁(箏)이라는 악기가 들어와 그대에게 보냈는데 받아 보았는가?”
“예, 폐하. 우리의 금(琴)과 비슷하였사옵니다.”
“그래, 그 소리는 어떠하였나?”
“너무 날카로워 서로 어울려 즐기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겼사옵니다.”
“짐 또한 악사의 느낌과 다르지 않았소. 그래서 악사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할까 하오.”
가실왕은 지그시 눈을 감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눈을 떠 우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악사, 짐은 가야의 모든 백성들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우리의 악기를 갖고 싶소. 그리고 그 악기로 연맹 각국의 서로 다른 소리와 음을 하나로 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 주었으면 하오.”
가실왕의 이 말 속에는 가야 연맹의 아픈 역사가 서려 있었다. 가야 제국이 연맹이란 이름으로 함께하고는 있으나 그 단결력이라는 것은 모래알을 뭉쳐 놓은 것과 같았다.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니에서 힘이 센 쪽에 붙어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던 것이 가야의 운명이었다. 가실왕은 음악을 통해 가야의 힘을 결집하고자 했다. 한일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란 엇박자로 온 국민이 하나가 되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가실왕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라를 하나로 묶는 악기를 만들다]
가실왕의 명을 받은 우륵은 먼저 가야만의 세계를 나타낼 수 있는 악기를 만들기로 했다. 어떤 악기라야 가야의 정신을 나타내고,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지 고민했다. 오랜 고민 끝에 문득 하나의 영상이 우륵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은 5월의 파종과 10월의 추수가 끝나면 귀신에게 드리는 제사 모습이었다.
가야에서는 5월과 10월, 두 차례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풍년에 대한 기원과 추수에 대한 감사의 제사였다. 가야 사람들은 이때가 되면 밤낮을 쉬지 않고 며칠 동안 음주와 가무를 즐겼다. 수십 명의 사람이 서로 따르며 땅을 디디면서 낮게 걸었다. 그들의 걸음은 손뼉의 리듬에 맞춰 끝없이 돌아갔다.
그런 모습을 해마다 봤지만 우륵은 볼 때마다 가슴 뭉클한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신명이 바로 가야의 혼이며, 그 혼은 바로 하늘을 이고 땅에 의지해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대한 희열이라고 우륵은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가야의 악기, 즉 가야금에는 이러한 정신이 담겨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륵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가야금을 만들어 갔다. 먼저 가야금의 위를 둥글게 하고 아래는 평평하게 만들었다.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하고, 평평한 것을 땅을 상징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를 허공으로 비워 놓았다. 이는 하늘과 땅 사이의 허공으로 천지 사방을 비유했다. 줄은 열두 줄로 했는데, 이는 1년 12달을 상징했다. 그리고 줄을 받치는 기둥을 3치로 하여,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의 인간을 뜻하는 삼재(三才)를 의미했다.
우륵은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의 소리를 담고 있는 가야금으로 가야 사람의 신명을 불러일으키는 12곡을 만들었다. 「하가라도(下加羅都)」, 「상가라도(上加羅都)」, 「보기(寶伎)」, 「달이(達已)」, 「사물(思勿)」, 「물혜(勿慧)」, 「하기물(下奇物)」, 「사자기(師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사(爾赦)」, 「상기물(上奇物)」이 바로 그 12곡의 이름이다.
[가야의 음악을 위해 망명의 길을 택하다]
대가야는 5세기 중엽을 지나면서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연맹의 국가들이 침략을 받을 때면 원군을 보내 구원해 주는 등 맹주로서의 지위를 다져 나갔다. 그래서 그 세력이 남쪽으로는 경상남도 합천 일대를 지나 거창과 함양을 아우르고, 서쪽으로는 전라북도 남원에까지 미쳤다. 이 시기 대가야는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는 등 대외 관계에 있어서도 보다 유연한 자세를 취하며, 왜국과의 교역도 활발하게 이어 갔다.
그러나 대가야의 성장으로 힘의 균형을 이루게 되자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서로의 이익에 따라 동맹을 맺거나 파기하면서 각국은 존립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 고구려의 공세가 거세어지자 신라와 백제는 동맹을 맺고 대항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제는 자신들의 땅이었던 한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그 땅을 가로챘다.
그러자 이번에는 백제가 대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게 되었다. 대가야가 백제와 손을 잡고 신라를 공격한 데는 결혼 동맹을 파기한 신라에 대해 보복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신라는 왕녀를 대가야로 시집보내면서 100명의 시녀를 딸려 보냈다. 대가야는 시녀들을 여러 현에 나누어 거주하게 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신라는 대가야가 그 시녀들에게 신라의 복장을 입히지 않았다고 트집을 잡으면서 왕녀를 데려 가겠다고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대가야가 이에 불응하자 신라군은 돌아가는 길에 도가(刀伽)·고파(古跛)·포나모라(布那牟羅) 등 세 개의 성을 공략하고, 거기에다 북쪽 경계를 이루는 5개의 성까지 빼앗았던 것이다.
대가야와 백제의 연합군은 신라를 침공했지만 오히려 막대한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 했다. 그렇게 된 데는 신라가 강하기도 했지만, 대가야와 백제의 전력이 이미 많이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제는 고구려·신라와의 연이은 전쟁으로 이미 힘이 소진된 상태였고, 대가야 또한 결혼 동맹을 파기하고 돌아가는 신라군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직 가야 연맹을 완전히 통합시키지 못한 대가야에게 그 피해는 엄청났다. 신라로부터의 연이은 피해로 대가야는 서서히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우륵은 대가야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나라의 운명과 함께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 자신이 죽고 나면 가야의 혼을 담은 악기와 그 음악은 어찌될 것인가? 우륵의 고민을 역사에서는 “그 나라가 어지러워지므로 악기를 들고 신라 진흥왕에게 투항하였다.”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우륵의 고민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륵이 신라에 투항했다는 것은 일신의 안락보다는 음악을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라 짐작하게 된다. 그것은 그가 가야 연맹을 통합하고 그 정신을 담기 위해 악기를 만들고 곡을 지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륵은 그 음악이 살아 있는 한 가야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륵과 그 후예들 - 청바지를 입은 우륵]
진흥왕은 신라로 망명해 온 우륵을 대가야 유민의 거류지인 국원(國原)[현 충청북도 충주]에서 머물게 했다. 그리고 그곳에 계고(階古), 법지(法知), 만덕(萬德)을 보내 우륵에게 악(樂)을 배우게 했다. 우륵은 그들의 타고난 재능에 따라 계고에게는 금(琴)을, 법지에게는 가(歌)를, 그리고 만덕에게는 무(舞)를 전해 주었다. 이것을 보면 우륵이 음악과 관련된 예술의 어느 한 부분에 달통한 것이 아니라 전 분야를 모두 꿰뚫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륵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만능 엔터테이너였던 것이다.
우륵의 악은 신라 사람들의 입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마침내 그 소문은 진흥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551년 진흥왕은 나라 살림을 살피기 위해 지방을 순시하는 도중 우륵이 거처하는 인근의 낭성(娘城)[현 충청북도 청주]에 이르자 그를 불러 음악을 듣고자 했다. 우륵은 진흥왕을 위해 새로운 곡을 지어 제자 니문(泥文)과 함께 연주하였다.
진흥왕은 우륵의 음악을 듣고 크게 흡족해했다. 그래서 신하들에게 우륵의 음악을 신라의 대악(大樂), 즉 국가 의례에 쓰이는 음악으로 삼을 것을 지시했다. 그러자 신하들은 일제히 반대를 했다.
“망한 나라의 악을 어찌 우리의 대악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대악이란 한 나라의 혼이 담겨진 것인데, 이미 망해 없어진 나라이고, 또 자신들에 의해 망한 그런 나라의 음악을 자신들의 혼으로 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신하들로서는 우륵의 음악을 대악으로 삼는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진흥왕은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쳤다.
“가야 왕이 음란하여 스스로 멸망한 것이니 음악에 무슨 죄가 있겠소. 대개 성인이 음악을 만들 때는 인정(人情)에 연유하여 법도를 지키도록 하기 위한 것이니, 나라의 다스림과 어지러움은 음조에 유래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진흥왕은 우륵의 음악에서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삶의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고 그것으로 곡을 지을 때 나타내고자 했던 마음의 소리, 즉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이 함께하는 소리였던 것이다.
우륵은 망명이란 한때의 치욕스런 선택을 넘어서 대가야의 혼을 신라의 음악 속에 되살려 놓았고, 그 혼은 계고(階古)와 법지(法知), 만덕(萬德)이란 제자들로 이어졌다. 그리고 어쩌면 그 혼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재능이 넘치는 우리의 젊은이들은 아시아 전역에 ‘한류’라는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그들은 어쩌면 노래와 연주, 그리고 춤에 능통했던 만능 엔터테이너 우륵과 그 시대 사람들이 21세기에 청바지를 입고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라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