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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014
한자 口述-記錄-二十世紀高靈-生活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임경희

[개설]

20세기 급격한 사회 변동의 와중에서 민중의 생활 모습은 거의 기록되지 못한 채 빠르게 소멸되어 가고 있다. 이는 고령 지역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삶은 20세기 고령의 역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고령종합시장 앞에서 담배 가게를 운영하면서 경북유도회 부회장과 성균관전교 등을 역임한 후 2008년 유명을 달리한 고 김태호[남, 80]를 비롯하여 쌍림면 유기공장 집으로 시집온 후 국수장사 등을 거쳐 고령상무사 반수를 역임했던 박점술[여, 76], 어릴 때 다리를 다쳐 열한 살이 되어서야 겨우 걸을 수 있었음에도 일제 강점기에는 징용과 6·25전쟁 때에는 징집을 당해야 했던 순박한 배순석[남, 90], 해방 전까지만 해도 대가야읍 내 최고의 부촌이었지만 지금은 쇠락해 버린 일량마을 사람 이중근[남, 81] 등 평범한 노인 4명의 구술 자료를 통해 20세기 고령 사람들의 생활상을 기록해 보았다.

[파란만장한 고령시장 앞 담배 가게 주인 김태호]

1. 보통학교 졸업 후 양복기술 습득

어릴 때는 집에 독선생을 앉혀 놓고 언문 공부 좀 하다가 열한 살에 보통학교를 들어갔어요. 열일곱에 졸업 맡았어요[했어요]. 졸업 맡은 질[길]로 할아버지 내 부산갈래요 하니 할머니하고 어머니가 저거 죽으러 가나 싶어 막 울고 그랬어요. 그래가지고 부산 니리가[내려가] 놓으니 할 수 있는 기[게] 뭐있습니까?

처음에는 철도국에 들어갈라 했지요. 그때 철도국이 직업 중에는 제일 좋은 직업이야. 그래 가지고 이발관에도 들어가 보고 목수한테도 들어가 보고 오만 짓 다 했습니다. 구둣방에도 가보고. 맨 마지막에 양복점에 가서 뭘 배우는데 그 기술을 잘 안 가르쳐 줍디다. 자습으로 배웠어요.

그래 있다가 방 한 칸 얻고 점포 하나 얻어가지고 하다가 만주까지 옷 팔러 갔습니다. 옷 한 벌 가져가면 여기 열 벌 값 받았거든. 섣달 스무 날인가 옷을 대여섯 벌 껴입고 그래 갔어요. 단추자국 뻘건 거 당고바지, 그걸 많이 가[가지고] 갔지. 그거는 이래 단추를 잠가뿌만[잠궈 버리면] 일일이 안 까 보만[보면] 모르거든. 이십오일 동안 댕기[다녀] 봤습니다. 열아홉에 장가를 갔어요.

집에 어른은 부산서 기반을 잡았습니다. 집을 큰 걸 하나 얻어가지고 한 육십 명 하숙을 했습니다. 왜정 때는 하숙하면 각 회사에서 월급을 주인한데 줬어. 그 때는 쌀집에서도 쌀을 한 달 내 먹을 거를 대줍니다. 쌀집 장사를 하는 데는 도꾸이[단골]를 많이 얻어야 되거든. 소비 관계상. 그래 실패를 했지 않습니까.

나는 부산 가던 길로 양복 일을 배아가지고 양복점을 했어. 그런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아버지는 그 때 하숙을 실패하고 고령에 와 계셨어요. 이삿짐 운반할 때 고령에 여기 차 한대가 왔다 갔다 했습니다. 일본 사람이 장사하는 기업차가 하나 있고 술도가 하나 있고. 고런 거는 전부 일본 놈이 했어요.

2. 고령에서 양복점·식당 경영 실패

우리 종조부님이 여기서 뭐 기와 공장도 하고 옛날 노인치고는 상당히 개명한 노인이었지요. 기와 공장은 저 천주교 그 장소[대가야읍 지산리 20-1번지 부근] 거기서 했어요. 그런데 왜정 때는 죽으면 앞에 금줄을 치우고 화장을 해야 됩니다. 우리 옛날 풍습으로는, 유교에서 화장하는 법이 없었거든. 그래서 밤에 가마니 쓰고 화장터에서 석유 뿌려서 헛불 질렀부고[질러 버리고] 경찰관 눈을 속여가지고 화장했다 하고 매장했어. 아버지 어머니는 전부 그래했습니다.

해방되고 다시 고령에 와서 양복점을 했어요. 그때는 양복 맞출라하면 광목가지고 즈봉[바지] 하나 만드는 데도 쌀 서 되씩 받아먹었어요. 쌀 서 되 같으면 요새면 신사복 삽니다. 세상이 그래 달라졌지요. 그런데 첨에 한복 입다 양복 입어 놓으니까 말이야 아이고 마 부끄러워서 못나갔어. 쪼매하다가 뭐 말았어요. 세상이 그런 판이니. 저기 우리 초등학교 졸업 사진이 있어요. 전부 두루마기 입고 모자 쓰고 그래 사진 찍었지 양복 입은 사람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음에는 내 동서하고 둘이 어불러[합쳐] 가지고 관(館)을 냈어요. 음식 장사였거든. 그때 여 종업원이 한 십여 명 있었어. 그 중에 장구 잘 치고 소리 일류 기생이 하나 있는데 백이십 원 인가 그래 주고 나머지기는 인자 뭐 입이나 얻어먹고. 대구서 맥주를 차떼기로 가지고 왔거든. 그래도 장사 경험 없는 사람이 성공할 수가 있나? 일 년 만에 손 털고 실패 봤붓지[봐 버렸지]. 위치는 시방 요 교회 앞에, 제일 교횝니다. 그 앞에서 남의 집을 얻어가지고 하다가.

3. 성공을 가져온 담배 가게

내가 여기 내려와 가지고 성공은 담배 장사밖에 안 했어요. 담배는 물건 갖다 주지, 외상없지, 인자 현금하지, 이래 놓으니까 거는 다리가 아파도 앉아가 하거든. 그래 시방은 심심 소일거리로 할마시[아내]가 시간을 보내려고 하고 있지요. 그걸 전매서에 말해 가지고 허가를 하나 냈어요. 고령에서 열다섯 번째로.

제일 처음에는 인자 대담배, 저 장수연 팔았지. 그때는 짐을 져서 배달 안 왔습니까. 담배 배달꾼이 지게를 짊어지고 저기 재를 넘어서 해인사까지 갔어요. 장사 잘 될 때는 한 갑 육 원짜리 파랑새 담배를 팔아서 하루 이오만 원 올렸으니 대단하지요. 고령에 전부 열다섯 집이 있을 때 우리가 매상고 일 이등을 했으니까. 전부 장보러 오면서 와가지고 매상 많이 올리지. 장날 한창 잘 팔릴 때는 옆에 두서너 사람 거들어야 돼. 원창 많이 팔려. 순 하급초지. 그 때 아리랑이 최고 비싼 이십오 원. 장수연이 십전하다가 해방 후에는 오 원 했고. 파랑새 육 원짜리가 말은 담배로서는 값이 최고 낮아.

고령 시장이 시골 시장 치고는 아주 잘 된 셈이지. 알로[아래로] 가야 합천이 전부 여 와서 장 보거든. 소전도 좋았고. 우리 할 때만 해도 쌀 내러오는 데도 등짐지고 와서 지게 위에 올려놓고 노점에 쭉 앉아서 했지. 촌사람들 와가지고 장에 앉아서 부글부글 끓는 국 먹고. 그때는 가게도 이런 가게가 아니고 나무를 가지고 기둥 세워 가지고 이래 했지. 저기 골목 시장으로 있다가 여 건물 세운 지는 한 삼십 년 됐을 거라. 옛날에는 전부 이 골목은 무슨 장사, 이 골목은 무슨 장사, 옛날에는 여 나무전 쭉 있었어요. 소전도 있고. 또 일반 잡화전, 요새 읍사무소 입구 거가 자리 장사 이런 거 했고, 경찰서 뒤가 곡물전이고, 저쪽에 현재 군수 집 들어가는 요 쪽이 진어물전이고. 그거를 전부 합해 가지고 이상봉이가 면장 때 이 시장을 개설했어요.

새마을 운동할 때 담배가 참 많이 팔렸어. 그러고 담배연합회 부회장을 했어. 전매서 표창도 탄 적이 있고. 아직까지 양담배 안판 거는 내 집밖에 없습니다. 그래가지고 여서 칠남매를 전부 교육 다 시켰어요. 맏이만 대학 나왔지 나머지는 고등학교 다 시키고 결혼 해가지고 다 잘 삽니다. 아들 셋 딸 다섯.

4. 고령 유림에 공헌

그 후로 바람도 많이 피고 온갖 짓 다 했지요. 그리고 한 평생을 유림에 몸담았습니다. 내가 그래서 향교서부터 경북재단 감사 세 번, 경북 유도회 부위원장 삼선, 성균관 전학 재선, 전의까지 올라가고 또 문화원에 거 부회장까지도 하고 한평생을 유림에 종사했지요. 향교에 명륜회(明倫會)도 처음에 내가 만들었고 명덕회(明德會)도 만들었고. 또 그걸 합하는 것도 내가 만들었고. 그래가 명(明)자하고 유(儒)자 하고 따서 명유회(明儒會)라 이런 거야. 유도회는 성균관에서 인정한 사단법인 단체고. 명유회라는 것은 우리 고령 유림에 사조직 단체고. 상덕회(尙德會)라는 것도 역시 장이나 또 향교 종사하는 사람들이 나와 가지고 따로 만든 친목 단체라 할까 그런 단체라요. 무식한 사람이 큰 일 했지.

[유기 공장 며느리 박점술의 국수 장사]

1. 고령으로 시집간 순천박씨

제가 열여덟 살에 결혼을 했거든요. 그때는 선도 보지도 안하고 인자 고령곽(郭)씨 양반이라고 말만 듣고. 우리는 순천박씨니 서로 양반이라고. 그때 남편은 군대 갔거든. 그래가지고 남편도 없는데 시집을 갔거든. 성주 수륜면 거기서 한 육십 리 길을 가마타고 갔어요. 지금은 길을 잘 해놨어요. 그때는 아주 산골짜기였는데 요런 오솔길을 가마를 타고 가는데, 문이 얄랑얄랑 거리니까 물에 빠져 죽을까 싶어 가지고 겁이 나더라니까요.

한 일주일 있다가 남편이 휴가를 왔어요. 그래 또 바로 가고. 책가방 놓고 간 사람이 뭐 할 줄 압니까? 길쌈을 할 줄 압니까? 뭐 밥 밖에 할 줄 모르는 거라. 바느질은 친정에서 두루마기, 도포 하는 거까지 다 배워서 갔고. 그래 일 년 시집을 살았어요. 첫 친정을 가야 되는데, 시월 초이튿날로 날을 받아 가지고 가니 우리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야야 너는 집에 가만[가면] 농사도 많이 없고 하니까 편하니까 머슴 서이[셋] 옷 해 놓고 한 달쯤 늦춰서 그믐날 가만 안 되겠나?” 이래. 시댁은 그때 유기 공장 하고 농사짓고 머슴은 큰 머슴 작은 머슴 꼴머슴 이래 데리고 살았어요. 그래 일 끝내고 그믐날 고령까지 걸어갔어요. 안화리에서 고령까지 걸어 오만 30분 정도 걸려요.

2. 유기공장을 경영한 시가

유기 공장은 아버님 대에서 했지요. 유기 공장을 하다 보니까 대목 때는 놋그릇이 딸리니까 도부꾼이 많이 와요. 한 번 들어오면 한 20명씩 들어옵니다. 원래 식구가 큰 머슴, 작은 머슴, 꼴머슴, 유기 공장 하는 사람, 우리 식구 여덟 사람이니 얼마나 많습니까? 항상 25여 명씩 있는데 여기에 도부꾼들 왔다 하면 어떨 때는 한 40명, 50명도 되고. 오면 너 마지기 큰 솥 거기 밥을 한 솥 해도 우리 먹을 밥이 없어요. 그래 굶고 자고. 먼데서 오는 사람은 우리 집에서 자고. 큰 사랑방이 있거든요 아버님 주무시는데.

도부꾼은 짊어지고 나가면 일찍 들어오면 한 10일이 걸리고 안 그러면 한 15일이 걸리고. 저 먼데까지 가는 모양이라. 강원도고 어디까지도 가는 모양이라. 혼자는 안 갑니다. 왜 혼자는 안 가노 하면 짐도 무겁고 유기를 팔만[팔면] 목화도 바꾸고. 또 우리 사는 데는 잡곡이 귀하니까 잡곡도 해가지고 오고 명주 요런 거 해가지고 오고 돈으로도 바꿔 가지고 오고해야 해요. 못사는 사람이 장사를 하니까 곡식도 가지고 오고. 그래 지게에 지고 가다가 자고 팔고 가다가 자고 팔고. 물건도 그릇하고 바꾸면 다른 장에 가서 팔고. 바꾼 명주 같은 거도 장에 가서 팔고, 고추도 팔고. 집에 필요 있는 거는 가지고 오고. 도부꾼은 누구든지 들어오면 유기 팔아 주니까 외상으로 물건 줍니다. 외상으로 주면 자기네 팔고, 노름 해가지고 돈 하나도 못 가지고 오는 사람도 있고. 그래가지고 돈도 많이 띠이[떼여].

3. 6·25전쟁을 기점으로 몰락한 시가

그 때 우리 시숙은 면서기를 했거든요. 막 6·25 나가지고 인민군이 그 골짝에서 넘어와서 인자 반동이라고 막 카면서 그랬지. 이웃 사람이 더 인심이 안 좋은 거라. 시동생은 부장이고 남편은 군인이고 또 시숙은 면서기고 그래가지고. 군대 간 사람 부인 내 놓으라 하니까 우리 어머니는 저거 집에 보내고 없다 하고 아무나 물으면 딸이라 하고. 그래 6·25전쟁 때 거기 다 뿌샀어[부수었어]. 폭격 당했거든요. 본 넣는 풍로가 녹아 가지고. 그런데 총탄피 안 있습니까? 그게 놋쇠거든. 상철이라 해. 그거를 주워다가 그릇 만들고 했는데 우리는 그 그릇을 안 만들었어요. 그 그릇을 만들면 참 첨에 좋아요. 가서 팔 때까지도 괜찮답니다. 그런데 집에서 썼다 하면 고만 색이 변하는 거라. 그거 만드는 사람 있었어요.

남편은 제가 33살에 제대 했어요. 지금 50살 먹은 애가 8살에 우리가 제대해 갖고 여기 왔거든요. 오니까 시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시아버지는 중풍이 들어 가지고 계시고 빚도 많고. 그래 퇴직금 받아 가지고 논 아홉 마지기를 샀어요. 농사를 3년을 지었어요. 3년을 짓고 가을 하고 나니 동네 사람이 금융조합 돈을 보증 섰으니까 그걸 갚아야 되니 갚아 달라고 해요. 그때는 농협이 금융조합이었어요. 그래 영감님이 저도 모르게 논을 다 팔아가지고 정리를 했어요.

4. 국수집 경영으로 자립

그때는 남편 무서워서 말도 못했어요. 그래 논을 팔고 살다가 보니까 남편 직업이 있습니까, 뭣이 있습니까? 애들 데리고 살라니까 살 길이 없었어. 우리 아들이 국민 학교 졸업할 적에 찾은 저금 21,600원만 남았어요. 중학교 입학금을 내고 19,000원이 남았는데 그때는 제 노력 아니고는 못 먹고 살거든요. 그때 친정이 대구여서 한 번은 대구서 물 국수 파는 거 보니까 재미가 있더라고요. 그래 19,000원을 가지고 대구에 국수틀을 사러 갔어요. 그래 국수틀을 사가지고 왔더니 영감님이 난리가 났어. 양반의 집에서 그런 걸 한다고. 밀가루를 가지고 국수를 빼서 주면 2원, 3원 받을 때고 쌀은 한 되 36원씩 할 이런 때라요. 그래도 힘들잖아요?

영감님이 60살 되는 해 중풍이 딱 드는 거라. 그때 신해식이라 하는 분이 바로 옆에 살았는데 고령상무사 좌사계 접장이라. 그래 가지고 우리가 보부상 제사를 지내면 안 되겠나 하니까 그 분들이 모시라 하데요. 옛날부터 보부상 제사를 모시면 재수 있고 이렇다 해서 영감님 중풍이 나을까 싶어 내가 자청해서 모셨어요. 그래 하다가 보니까 나았어.

[일본 징용 생활을 했던 허약한 배순석]

1. 병치레로 보낸 유년 시절

나는 고령면 낫질에서 났지. 본관은 성주. 아버지도 거기서 났고, 할아버지도 거기서 났고 윗대도 육대 조까지 거기서 났어요. 큰 집 두 집도 거기 살았고. 형제간은 누님 한 사람, 여동생 하나, 남동생 둘 해서 오남매. 농사는 큰 집에 같이 한 스무 마지기 정도 지었지요. 살림 털고 나올 때는 논 서너 마지기 들고 나왔고. 살던 집은 아버지가 산에서 나무 해가지고 와서 대목 불러다가 지었지요. 방에는 흙 발라 가지고 풀 끓여 가지고 붙여 가지고 그랬어요. 도배 안 했습니다. 바닥에는 골 자리, 없는 사람은 삿자리 펴 놓고. 큰 집에는 방이 많고 우리는 방이 세 개 밖에 안 되었어요. 아버지는 아랫방 쓰고 나도 아랫방에 아버지랑 같이 거처하고 엄마하고 동생들은 엄마한테 자고, 한 개는 헛간처럼 쓰고.

세 살 때 여름에 평상 조그만 것 펴 놓고 감 조그만 걸 주워와 가지고 거기 물 부어 가지고 호작질[소꼽놀이]하고 그러다 마 널쪄[떨어져] 버렸어요. 널찔 때 기억이 나요. 갑작스레 널쪘는데 엄마가 왔던가, 할배[할아버지]가 왔던가? 서라 카는[하는]데 설 줄을 몰라 갖고 그 질[길]로 고생 많이 했지요. 한의원이랄까, 돌팔이랄까 오만[온갖] 데 다 댕겼죠[다녔죠] 뭐. 아버지랑 업고 뭐 저 외갓집에도 가서 보고, 약은 할아버지가 지으러 다녔지요. 약 억시[많이] 먹었지요. 소 오줌도 먹으면 낫는다고 많이 먹었지요. 산에 가서 약초 뿌리도 캐가[캐서] 먹고 한약방에 가서 약도 지어 먹고, 여섯 살 때까지 약방에 가서 탕약을 먹고 그랬지요. 곱사쟁이 된다고 그랬답니다. 한 아홉 살 되어서 작대기 짚고 아무 데나 가고 했지. 세 살부터 아홉 살 걸을 때까지 큰 집에 사촌 누님 둘이 매달렸지요. 어릴 때는 주로 큰 집에서 살았거든. 엄마가 모 심으러 가든지 하면 하루 종일 큰 집에 갖다 놓고, 밥 주면 밥 먹고 그래 보냈지요. 그때는 옷도 어머니가 집에서 명[무명] 따고 삼 만들어서 베 짜가지고 옷 만들어 입었지요. 장에 가서 떠가[사서] 오는 건 별로 없고.

그러다가 열한 살 먹었을 때부터 잘 걸어 다녔어. [그렇지만] 공부도 못 했고 일도 어째 하면 되는고[되는지] 몰랐고. 한 열세 살 먹었을 때부터는 고령장에 다녔어요. 우리 엄마가 시켜 가지고 소다 사러 많이 왔어요. 배 아플 때는 소다 먹고 살았지요. 그때 15전 주면요 어부[꽤] 컸습니다. 그거 한 뭉티기[뭉치] 사오면 한 열흘 씩, 보름씩 먹었지요. 하루에 두 번 먹을 때도 있고 심하게 아플 때는 세 번 먹을 때도 있고. 소다 먹고 나면 시원하게 트림 나오고 괜찮아. 그때 고령장까지는 한 시간 반 걸렸을 겁니다. 스물한 살 먹었을 때는 가면 한 40분, 50분에 가도 그 전에는 한 시간 넘게 걸렸지요. 고령장에는 판떼기[판자] 모아 놓고 가게라고 펴 놓고 얄궂었습니다. 길도 좁은 길이고. 열여섯 될 때 일도 하러 다니고, 산에 가서 나무도 하고 풀도 뜯어 가지고 오고했지요. 친구들 하고도 놀고.

2. 홍가의 중매로 결혼

결혼은 스물한 살 먹었을 때 했어요. 우리 마을에 사는 종이 장사도 하고 붓 장사도 하는 거기가 홍(洪)가인데 자기 집안사람을 우리 집으로 중신을 했지요. 선은 못 봤어요. 자기 큰 오라바시[오빠]가 날 보러 왔어요. 그래 보고 가가지고 하자고 연락 왔지. 사성은 우리 사촌이 썼어요. 함은 동네 하인을 짊어지워 가지고 보냈어요. 그때는 동네에 하인이 두 집 살았어요. 하나는 부부고 하나는 혼자 사는데 마실[마을] 사람이 전부 다 부렸어요. 신부 집에 결혼식 하러 갈 때는 가마 타고 가고, 백부 어른은 말 타고 가고. 가마는 하인 둘이가 메고 여자는 그냥 따라가지요.

저쪽에 가가지고 그 여자가 음식 갖다 날라 주고 그러지요. 예물은 은가락지·쌍가락지 하고 옷감 세 벌, 네 벌? 그때 돈으로 10원 들었을 겁니다. 그때 10원이면 쌀 두가마니 되지. 우리 집에 해오는 건 이불 두 채. 아버님 이불 한 채 하고, 우리 덮으려고 한 채. 또 아버님 바지, 두루막 해가지고 왔고, 나도 바지 두루막 해오고 그랬지요. 신부는 [결혼식을 한 후] 한 해 있다가 그래가 옵니다. 나는 뭐 결혼하고 한 서너 번 갔나? 설에 가고, 설 쉬고 봄에 한 번 가고, 여름에 삼 가지고 한 번 가고. 삼은 옷을 해가지고 오라고.

3. 집안의 반대에도 일본의 징용 생활

그리고 나는 일본 갔지. 스물한 살 때 추석에 결혼하고 설 쉬고 스물두 살에 갔지요. [신부가] 처가에 있을 때에. 밭에 가서 밭 맨다고 있는데 다른 마실 사람이 “군인들 모집 왔단다. 일본 델고 갈라꼬[데리고 가려고] 모집 왔단다.” 이캐[이래]. 그래 일본 가고 싶어서, 아버지한테 말하면 못가도록 할 거고 몰래 밭에다가 호미고 뭐고 나둬 버리고, 허락 안 받고 갔습니다. 고령경찰서에 와가 있습디다.

그날 밤에 읍에 여관서 자는데 여관 아주머니가 와가지고 “아이구 이 손을 가지고 어디 가서 일할라 카노. 가지 마라 큰 일 난다. 집에 가라. 아버지 시키는 대로 농사일이나 하고 말지.” 카면서 자꾸 말리는 기라. 우리 집 어른도 알고 큰 아버지도 알고 다 아는 분이라. 그래 말려도 하룻밤 자고 안 갔습니까.

그때가 6월 달, 더울 때야. 그래가지고 아침에 대구 달성공원에 거가서 점심 먹고 부산에 가가지고 하룻밤 잤다. 자고 아침 먹고 일본에 배 타고, 연락선 타고 갔지요. 고령 군내에서 백 명이 갔습니다. 돈도 얼마 주는지 그것도 모르고 돈 벌러 가면 짜다라[그다지] 고생 안하고 편하게 지낸다고 해서 갔지요.

배에서 내려서는 거기서 아침 먹고 기차 타고 요코스카에 갔지. 가니깐 1호실, 2호실, 3호실이 있었어요. 한 방에 백 명씩. 그러니까 우리 고령서 백 명 가고, 군위서 백 명 가고, 또 어딘가 기억이 안 나는데 거기서 백 명, 그래서 1호실, 2호실, 3호실 딱딱 정해 줍디다. 그래 가지고 이틀 놀려 주대요. 사흘 만에 일하러 가자고 하데요. 가니까 일시키는 사람, 십장도 있고. 방에서도 스물 씩 스물 씩 짜가지고 방안에서 책임지는 사람을 하나 정해서 이 사람은 가서 일은 안하고 십장 맨치로[처럼] 시키고.

거기 가니까 산이 저래 있으면 파가지고 구루마에 실고[싣고] 갖다 비우고. 또 어떨 때는 기름 창고 한다고 논 서마지기 정도에 갑바를 대고 그 안에 기름 넣는다고 하고, 그런 거 근 한 오십일이나 시킵디다. 아침 7시에 나가면 저녁 5시 정도에 들어옵니다. 나는 거기 사흘 가니깐 어떤 노인네 한 사람이 와서 연장 창고 그걸 지키라고 하는 기라. 그래 그거 했습니다.

거기서 2년 있었어요. 그때 1940년(소화 15)인데 한 달에 한 십 원 받았는가? 한 달 되면 봉투에 넣어 가지고 갖다 줍디다. 십 원 받아서 놀러 가는 데도 쓰고, 집에도 보내 주고 그랬지요. 집에 보내려면 거기 사무실이 있습니다. 거기 사무실에 가서 우리 집 주소 쓰면 그 사람들이 돈을 봉투에 넣어 가지고 우체국에 가져가서 부쳐 줍니다. 내가 가서 부치는 기[게] 아니고. 다달이 그래는 못 보내고 두어 달이나 석 달 있으면 돈 십 원 보내고 했지요. 한 달에 두 번 노는 날 놀러 가니까 쓰고 구두도 맞춰 신고 옷도 사 입어야지, 돈 모을 여가가 없어요. 그때 구두를 처음 맞췄지. 한 달 월급, 십 원 줬을 기야. 가다마이도 처음 사서 입었지, 30원 주고. 놀러 갈 때는 일본 사람들이 인솔해서 다녔지, 우리 마음대로는 못 가요. 거기서 2년 있었습니다.

4. 일본 생활 마감과 6·25전쟁으로 징집

그러고 넉 달쯤 더 있다가 [일본에서 다니러 온다고] 집에 왔습니다. 대구역에서 내려 가지고 어데고[어디지]? 대구 신암동, 거기 큰 방앗간이 있었습니다. 거기 와야 버스가 오는 기라. 거기서 버스 타고 집에 안 왔습니까? 그때 버스에는 내리라 카고[하고] 그라는[하는] 여자 차장이 있었지.

대가야읍에 내려 가지고 아버지는 본래 술을 좋아하니까 약주 도가에 가서 술 한 병 사고, 할아버지하고 집에 모친하고는 고무신 한 켤레씩 사고 그래가 집에 왔지요. 집에 오니까 대목이라 큰집에 가고 아무도 없어. 큰집에 가니까 아버지하고 큰 아버지하고 백모님, 엄마, 우리 고모, 형수 서이[셋] 모두 한방에 있습디다. 식구는 뭐 그냥 방에가 앉았습디다. [보는 게] 와가지고는 처음이었지요.

돌아와서는 집에 어른캉[과] 같이 농사짓고 있다가 45년에 해방되고 5년 뒤에 6·25전쟁이 나가지고 또 모집되어 가지고 안 갔습니까. 모집이 나와 가지고 강원도 양구에 가서 한 이태쯤 있다가 정전되고 나서 왔습니다.

서른다섯 살 먹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지요. 그런데 돌아가시자 고마마[그만] 집이 자꾸 파산이 되는 기라. 오십 넘어서면서는 마음이 미쳤어요. 이사 가고 싶어서. 거기서는 한 이십년 살았을 기라. 그래서 집에 식구한테 “나 여기 못살겠다. 이사 가야겠다.” 이렇게 말하고 온 게 여기 오게 된 거라.

[이중근이 들려주는 ‘옹기골 때문에 쇠락한 일량마을 이야기’]

1. 일량(日良)마을의 지명유래담

이중근이 기억하는 일량마을이 망했다는 지명전설이 있다. 일제 때는 대가야읍면에서 우리 동네가 제일 부자라. 일등 내곡, 이등 간동 이캤거든[이랬거든]. 저게 덕곡 가는데 저 간동 동네가 참 이름 있는 동넨데, 그 동네가 우리 동네 땜에 이등 밖에 못 하고 그래 잘 살았는데 옹기굴이 들어와 가지고 그런 지 그 후로는 이래 삽니다. 전설에 의하만[의하면] 호랑이 꼬래이[꼬리]에다가 불을 지피면 동네가 안 빈다카는데[안 보인다는데] 호랑이 꼬래이에 불을 붙여 가지고. [그게] 우리 [마을] 뒷산이 호랑이 산이라고요. 요기 능선을 보만[보면] 호랑이 꼬래이라.

옹기골은 일량마을 회관에서 100m 정도 안으로 더 들어가면 있어요. 기술센터 저 짝[쪽] 맞은편에 그 흙이 많이 나와예[나옵니다]. 우리도 학교 갔다 와가지고 니리가[내려가] 보고 했는데 뭐 할 때는 한 삼 메다[m] 니리가 가지고 흙을 빼내고. 그 흙을 가지고 옹기를 맨들마[만들면] 인자[이제] 시중 판매를 하고 이래 됐는 기라.

동네 사람이 짊어지고 가서 고령 시장에도 내놓고, 각 고을에 주문이 들어 오만[오면] 각 군에 돈 받아서 팔러 가고. 짐차, 연탄 차 그런 거에 실고[싣고] 거창에 거[거기] 안양반들 따라가 가지고 열흘이만 열흘, 보름이만 보름 온 촌 동네 이웃에 댕기면서[다니면서] 그래 팔아가지고 오고, 도부꾼을 딜고[데리고] 가가지고 마을마다 선전을 해가지고 팔아가 오고 이랬거든.

하여튼 전국에서 일항 옹기라 카만[하면] 판매가 제일 좋았다 말이라. 어른들한테 물어 보니 1943년 그때 인자 김옥춘이라는 사람이 자기 기술이 있어 가지고 거게 굴을 해가지고 옹기를 굽기 시작했어요. 그 후로 잘 된다고 소문 듣고 내곡2동 도개촌 가는 마을 뒤에 또 옹기굴이 하나 생겼고, 고[그] 후 선양동 카는[하는] 데 하나 생겼고 농촌지도소 앞에 생겼고, 굴이 니[네] 기 생겼어요.

[그런데] 까마구[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백여 석 꾼 하는 집이 몇 집이 있었는데 갑자기 다 안 조졌붓나[망해 버렸잖아]. 그래 그기 동네가 망하는 거라. 그러이[그러니] 동네 어른들이 “굴이 호랭이 꼬래이에 불을 씨가[지펴서] 동네 망한다.” 캐가[해서] 동네 청년들이 막 못 하구로[하게] 훌치[쫓아]내고 데모를 하고 그런 기라요. 옹기골 떠나라고요. 그래 할 수 없이 이전을 했다고 나는 듣고 있어요. 동네에서 폐업된 거는 60년 되고.

2. 일량마을의 특산품 벼루

옹기 이전에 여기가 주특기가 뭐고 하만 비룹니다[벼루입니다]. 붓글 쓰는 비루. 벌써 윗대에서부터 해서 우리 동네가 옛날부터 아주 유명한 뎁니다. 저 뒷산에서 그 돌이 나는 기라, 그 비루 돌이. 거서 구들장 맨치로[처럼] 칼로 떠가지고 짊어지고 와가지고 [만들어요], 그때 당시에 집집마다 비루 안파는 집이 빌루[별로] 없었어요. 좀 산다 카는 사람은 안했지만도 그거 외에는 벼루 파가지고 그거 해가지고 먹고 살았어요. 그래가지고 사실 우리 동네가 살기[살게] 됐어요. 우리 증조부님께서는 비루를 지고 강원도까지 팔러 갔는데 각중에[갑자기] 몸이 편찮아서 거서 별세를 했붓다고요. 그래 우리 할부지하고 큰집 할부지 하고 강원도로 가서 모시고 와서 우리 종산에 안장을 시켰다 하거든.

우리 삼촌이 그 비루를 요새 말로 하자면 직매를 했어요. 동네 사람이 집집마다 비루를 파가지고 우리 삼촌한데 바칩니다. 그러면 우리 삼촌이 모다가[모아서] 사고. 그때는 장사가 많이 다녔어요. 오만[오면] 우리 사랑에 와가[와서] 자는 기라. 영감들이 둘이나 서이[셋] 와가 자는데, 우리가 있는 이런 지게 안 하고 목발도 질게[길게] 가지고 작대기가 지금 좌사계에 있는 그 작대기라. 그 영감들이 말이지 비루 가지고 순전히 걸어 댕겼거든[다녔거든] 그때는. 짊어지고 가다가 디만[힘들면] 작대기 그놈을 가지고, 끝이 이래 제비 주디[주둥이]매로[처럼] 생겼는데 그걸 반가[고여]가주고 쉬는 기라. 그래 또 가고. 요새는 그런 약단지도 없지만은 약단지 맨트로[처럼] 고런 걸 새끼를 가지고 요래 얽어 가지고 고 [지게] 목발에 달아 가지고 짊어지고 와. 그래 아침에 자고나만 밥을 해 먹는 기라. 부석[부엌]에다 대고 걸어 놓고 단지 우에[위에] 접세기[접시]를 얹어 놓고 하는데, 막 거품이 뽀록뽀록 올라오는 기 묵는데 보만 참 구신내[구소한 냄새]가 나요. 째매할 때[어릴 때]에 그 먹는 거 굉장히 맛있어 보이는 기라. 그래 우리가 알거든요.

[참고문헌]
  • 인터뷰(김태호, 남, 80세, 2006)
  • 인터뷰(박점술, 남, 76세, 2006)
  • 인터뷰(배순석, 남, 90세, 2007)
  • 인터뷰(이중근, 남, 81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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