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A02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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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동락 |
[고령향교, 최고 명당에 자리 잡다]
연조리에는 1600년의 고령 지역 역사를 품고 있는 고령향교가 위치하고 있다. 고령향교가 자리한 곳은 고령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으로, 주산(主山)[혹은 이산(耳山)]의 지맥이 뻗어 나와 만든 구릉 위에 자리 잡고 있다.
1819년(순조 19) 당시 고령현감으로 있던 권중이(權中履)가 쓴 「고령향교 중수기」에는 1702년(숙종 28)에 향교가 중수되자 하얀 까치가 날아왔는데, 이를 보고 고을 사람들이 “땅의 기운이 신령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는 구절이 있다. 또, 명당에 향교가 세워져서 “지기(地氣)가 감응하여 고령에서 많은 훌륭한 학자들이 많이 나왔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옛 사람들이 명당이라고 한 곳은 현재 사람들이 보기에도 좋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고령향교가 위치한 자리는 풍수 지리적으로 어떤 곳일까? 고령향교에서 바라본 주산은 탐랑성(貪狼星)의 목성체(木星體)라고 한다. 탐랑성은 북두칠성 중의 첫 번째 별로 오행으로는 목성에 해당하는데, 산의 형태가 대나무의 죽순처럼 끝이 뾰족하게 단정하고 수려하게 솟은 모양이라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특히 주산에서 흘러내린 내룡(來龍)은 지기가 뭉쳐지는 혈장(血場)까지 몇 차례 굽이치면서 향교까지 잘 이어지고 있다.
회천[일명 모듬내] 너머에 위치한 망산(望山)은 고령향교의 안산이면서 곧 조산이 된다. 이 안산은 마치 미인의 눈썹과 같은 아미사(蛾眉砂)를 이루어 있는 귀한 형태이다. 왼쪽의 청룡은 혈장을 완전히 감싸 주지는 못하지만 혈을 향하여 몇 겹으로 안아 주면서 보호하고 있다. 향교의 내룡이 흘러내리면서 만든 능선이 내백호가 되고, 주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외백호를 이룬다. 따라서 고령향교의 사격(砂格)은 혈을 여러 겹 감싸 주고 있어 좋은 풍수적인 형상을 갖추고 있다.
고령향교의 형상은 유혈(乳血) 중에서도 대유(大乳)에 해당한다. 그리고 내룡의 기세가 강하여 혈을 맺고도 그 만큼 기운이 남아 혈 앞에 뭉쳐져 생기가 밖으로 빠져 나가지 않게 잘 막아 준다. 백호 쪽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이 혈장을 감싸고 흐르며, 청룡에서 흘러나온 물길이 고령향교의 내명당에서 만나 대가천과 합쳐진다.
대가천은 흐름이 완만하고 유유하며 청룡(靑龍)[풍수지리에서, 주산(主山)에서 왼쪽으로 뻗어 나간 산줄기]과 백호(白虎)[풍수지리에서, 주산(主山)에서 오른쪽으로 뻗어 나간 산줄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내명당과 만나므로 혈장에서 곧게 흘러내리지 않아 길지에 해당한다.
[고령향교의 변천사]
고령향교가 처음 창건된 시기는 1413년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는 “현 서쪽 2리의 이산(耳山) 아래”에 건립되었다고 나와 있다. 이후 ‘관백전(官栢田) 우협(右峽)’으로 1차 이건한 것으로 보이지만, 시기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그러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향교가 소실되자 위패만을 옮기게 되었다.
즉, 향교의 노비가 위패를 주산 아래인 연조리 관음사 뒤편에 묻었던 것이다. 그리고 난이 끝난 후 그 자리에 향교를 중건하였다. 이것이 2차 이건이다. 그 후 1663년 현감 조봉원(趙逢源)이 부임하면서 중수 공역을 시작하였다. 당시 공역은 1663년 11월에 시작하여 1664년(현종 5) 3월에 마쳤다. 그리고 1665년(현종 6) 7월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로부터 중수기를 받았다.
이후 1702년 2월 현감 구문유(具文游)가 고을 인사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건 공사를 시작하여 6월에 완공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이것이 3차 이건이었다. 고령향교는 1819년 3월 현감 권중이가 부임하면서 다시 중수하였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고령향교는 처음 건립된 후 몇 차례 자리를 옮겼으며,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은 것은 1702년이었다. 현재의 고령향교는 대성전을 뒤쪽에 배치하고 앞에 명륜당을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이다. 그리고 공자 등 중국과 우리나라의 스물일곱 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한편, 2000년 8월 고령향교 주변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 대가야 궁성의 일부로 보이는 건물 터가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고령향교가 위치한 곳이 원래 대가야 시대의 궁성 자리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가야읍내에서 고령향교 쪽으로 올라가는 길목의 삼거리에는 지산동 당간지주가 서 있다. 당간지주는 보통 절의 입구에 세우고 당(幢)이라는 불교 깃발을 매다는 것이다. 당간지주를 지나 200m 정도 올라가면 고령향교가 있는데, 고령향교 건물에는 사찰의 것으로 보이는 석탑재가 사용되고 있다. 특히, 향교 옆에 있는 지산리 모산골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 ‘물산사(勿山寺)’라고 새겨진 기와 조각이 나와서, 이를 통해 향교와 그 인근 지역에 물산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고령향교 오른쪽 옆 공터에는 ‘대가야국성지비(大伽倻國城址)’라고 쓴 비석이 있다. 이 비석 앞에는 1990년 12월에 쓴 ‘이석기(移石記)’라는 안내 표석이 세워져 있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조선 점령의 합리화하기 위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임나일본부가 있었던 곳이 대가야 고령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1939년 당시 조선 총독이던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고령향교 옆에 ‘임나대가야국성지비(任那大伽倻國城址碑)’를 세웠던 것이다.
해방 후 고령군에서 비석의 ‘임나’와 ‘남차랑’의 글자를 지우고 그대로 유지하다가 1986년 12월에 이 비석을 독립기념관으로 옮기고 대신 현재의 비[대가야국성지비]를 세운 것이다.
[고령향교에서 고령의 역사를 보다]
고령향교가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다. 대가야 시대에는 나라의 중심인 궁성과 왕실 건물들이 즐비하게 건립되어 있다가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왕궁은 폐허가 되었다. 대신 신라에서는 대가야 궁성이 있던 곳에 관청을 만들고 고령 지역을 다스렸다. 하지만 통일신라 시대에는 왕궁 터 자리에 사원이 건립되어 망국의 한을 안고 살아가던 고령 사람들의 민심을 달랬다. 그 절이 바로 물산사로, 고려 시대까지 고령의 중심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후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시행한 조선 시대로 들어서면서 물산사는 점차 쇠퇴해져 갔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인 18세기에 접어들어 그 곳에 다시 고령향교가 자리 잡게 되었다.
1702년 향교를 현재의 위치로 옮길 때 땅 속에서 옥기와, 기와, 주춧돌 등이 나왔다고 한다. 이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옥기와 등은 대가야 시대의 궁궐의 흔적이라고 인식하였다. 일제 강점기가 되자, 일제는 식민 통치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곳에 ‘임나대가야국성지비’를 세웠다.
이처럼 고령향교는 대가야 시대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는 고령 지역의 장구한 역사의 흐름을 한 몸에 품고 있는, 말 그대로 유서 깊은 역사적 장소라 할 수 있다. 고령에 오면 꼭 연조리의 고령향교에 들러 고령의 1600년 역사를 되새겨 보길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