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A030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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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경용 |
[대가야 문화를 알리는 데 앞장서다]
2003년에 결성된 ‘대가야문화가꾸기회’는 77~80세 되는 지역 원로들의 지역 사랑, 문화 사랑 모임이다.
“나이 먹은 사람으로서 기억이 있을 때 대가야 문화를 잊히지 않도록 해야지요.”라는 회장 서경규[1931년생] 씨의 말이 이 모임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이들은 잊혀 가는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발굴, 전승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는 한편으로 젊은 세대들이 잘 알지 못하는 설화나 구전 지식을 바탕으로 대가야의 얼을 되새기고 있다. 『일본고지기(日本高誌記)』의 기록과 구전, 지형 조건, 물증[배맷돌] 등을 바탕으로 10여 년 전 대가야읍 치사리(致士里)에 ‘대가야 조선소지(大伽倻造船所址)’라고 새긴 비석을 세운 것은 그런 정신과 노력이 일구어 낸 결실이다.
대가야읍에서 성주 방향으로 자리 잡은 중화리 일대는 예전부터 ‘정정골’로 일컬어져 왔다. 정정골이란 이름은 이곳에서 항시 가야금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악성 우륵 선생이 가야금을 만들어 켜면서 살았던 마을이기 때문이다.
마을을 바라보는 언덕에는 우륵기념탑이 서 있다. 2005년에는 정정골에 우륵박물관이 들어섰는데, 대가야문화가꾸기회에서는 그때 이곳이 ‘가야금을 만들어 기예를 닦던 예인(藝人)들의 보금자리’임을 알리기 위해 ‘금장지(琴匠址)’ 표석을 세웠다.
대가야문화가꾸기회는 향후 ‘대가야 알터’를 고증, 복원하는 일과 고령의 근대 대표 인물을 현창하는 사업도 추진 중이다. 회원들이 연로하여 추진력이 많이 약화되긴 했으나, 자료 보강과 더불어 조만간 실현시킬 계획이다.
대가야 알터는 지금의 양전동 암각화가 위치한 일대로서 일곱 개의 알에서 칠 형제가 태어났다는 설화를 담고 있다. 가장 맏이가 고령의 대가야를 세운 것을 비롯해 아래 형제들이 성산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금관가야 등 일곱 개 가야국을 차례로 세웠다는 얘기다. 알터 복원 사업은 대가야국의 중심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고령의 정체성을 강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가야문화가꾸기회 회장인 서경규 씨는 고령 사람들의 귀감이 되는 근대 인물로 독립 운동가 김상덕(金尙德)과 신철휴(申喆休) 씨, 독지가 이봉조(李鳳朝) 씨 등 세 사람을 든다. 서경규 씨에 따르면, 대가야문화가꾸기회에서는 이들 세 사람의 행적을 기록으로 알리고 현대인의 귀감으로 삼고자 추모 혹은 기념을 위한 공간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광복 후 제헌의원을 역임하기도 한 김상덕 씨는 상해임시정부 문화부장으로 김구 선생을 도와 국권 회복 운동에 많은 공을 세웠다. 신철휴 씨도 독립투사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8년간 옥고를 당했는데, 광복 후에는 고령군 대표로 건국 운동에 참여했다.
‘이주사(李主事)’로 불렸던 이봉조 씨는 일제 강점기 고령군청 서기 출신으로, 경신년[1920년] 대홍수 때 장기동의 고령장터가 회천(會川)의 범람으로 물에 잠겨 주민들이 길거리로 내몰리자, 사재를 털어 지금의 연조3리에 집을 지어 이들을 정착시켰다고 한다. 이곳이 ‘새동네’로 불리는 것은 이로부터 유래한다고.
[원로들의 고령 사랑으로 빚어내는 대가야 문화 가꾸기]
대가야문화가꾸기회에서 대가야 문화 가꾸기 사업을 추진해 온 중심에는 연조2리 봉두골에서 태어난 서경규 씨가 있다.
그는 고령토건을 설립하여 한때 ‘고령 부자’로 소문날 정도로 많은 재산을 모으기도 했는데, 통일주최국민회의 대의원과 도의원을 두 번씩이나 역임했을 뿐만 아니라, 재향군인회장과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장, 평통자문위원회장, 새마을금고 이사장, 고령군노인회장 등으로 지역 발전에도 공헌해 왔다. 불편한 몸으로 운신하기 힘든 노구에도 대가야 문화를 가꾸는 그의 노력은 멈춤이 없다. “후세대가 대가야 문화를 더 잘 가꿀 수 있도록 오솔길을 닦는 정도”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쳐 난다. 원로들의 고령 사랑으로 대가야 문화가 활짝 꽃피울 날도 머잖은 것 같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