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C010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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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동락 |
[국민학교 교실에서 예배를 시작하다]
도진리는 고령박씨 집성촌으로 고령 지역의 대표적인 양반 마을이다. 이 때문에 충과 효를 숭상하는 유교적 풍습이 강하게 뿌리내려 기독교가 정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인해 교회가 처음 생긴 것은 비교적 늦은 시기인 1951년이었다.
도진리에 처음으로 기독교의 복음을 전한 개척 교인은 당시 우곡고등공민학교[우곡중학교 전신]의 김기윤 교장과 고령읍교회 집사인 민명수 씨였다고 한다. 1951년 9월 12일 안림교회의 김종필 목사를 모시고 김기윤, 민명수 등 열두 명이 도진국민학교[현 우곡초등학교 도진분교] 교실을 빌려 창립 예배를 올렸다. 도진리에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1952년 1월부터는 안림교회의 김복관 전도사가 처음으로 부임하여 목회를 이끌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에 교회를 짓기 위해 도진리 247번지[현 우곡제일교회 자리] 일대 밭 300평[991.74㎡]을 구입하고, 1955년 6월에는 도진들의 밭 150평[495.87㎡]도 구입했다.
그러나 1956년 4월부터 도진국민학교를 예배당으로 이용할 수 없게 되어 2개월간 대장산의 나무 아래나 모듬내[회천] 강변, 때로는 잔디밭에서 예배를 드리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같은 해 6월 도진리에 3칸짜리 초가를 구입하여 수리하고 교회로 활용하였다. 처음으로 교회 예배당을 갖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교인들의 힘으로 교회를 짓다]
초가집을 교회로 활용하던 교인들에게 새 교회 건물은 언젠가는 꼭 이루어야 할 꿈이었다. 이에 제4대 목회자인 민명수 장로를 중심으로 1961년 3월에 15평[49.59㎡]짜리 목조 예배당 신축 공사를 시작해 5월 13일에 준공하였다. 교인들의 힘으로 최초의 교회를 완공하고 입당 예배를 드린 것이다. 그러다가 1963년 9월에 인근의 사촌리에 사촌교회가 설립되면서 도진교회 신도들이 분립되어 나갔다. 이로 인해 도진교회 신도수가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1967년 12월에 제9대 교역자로 오명근 전도사가 부임하면서 도진교회 최초의 부흥 성회를 가졌다. 그리고 1968년 4월 대한청소년 성경구락부를 설립하여 학생 80여 명을 모집하여 교육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69년 3월에 60명을 모집했고, 1970년 3월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또, 1970년 3월에도 신입생 50명을 모집키도 했지만 교육에 열정을 가졌던 오명근 전도사가 타 지역으로 이거해 가고, 주민들이 자녀들을 중학교에 입학시킴으로써 점차 성경구락부는 쇠퇴해져 갔다. 이로써 1975년 제3회 졸업식 후 성경구락부는 폐교할 수밖에 없었다. 도진교회의 성경구락부는 당시 중학교에 진학하기 어려운 환경의 학생들을 교육함으로써 지역 사회에 크게 공헌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우곡제일교회로 거듭 태어나다]
도진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은 1961년에 세웠던 교회가 오래되고 낡아서 예배를 드리기에 적합하지 않자 기존 교회는 교육관으로 활용하고 사택이 있던 자리에 새 교회를 건축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980년 7월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9월 12일 새 예배당 건축 기공 예배를 드렸다.
1981년 9월에는 예배당 건립이 진행되는 과정 중에 교역자 사택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83년 5월 19일에 예배당이 준공되어 입당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하여 구 건물은 교육관으로, 신축 건물은 예배당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4년 1월 새 성전 봉헌 예배와 임직 예배를 함께 드렸다. 이때 교회 이름을 도진교회에서 우곡제일교회로 바꾸었다.
이처럼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은 도진리만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우곡면 전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목표를 표방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우곡제일교회는 명실상부한 우곡면 제일의 교회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이후 1991년에는 교육관을 증축하였다. 특히, 1992년부터는 도시 교회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오던 것에서 벗어나 외부의 지원 없이 재정 자립을 이루게 되었다. 1995년부터는 미약하지만 신촌교회 등 타 교회에 재정을 지원하는 선교하는 교회로 발전하였다. 1996년에는 목회자의 생활관인 사택을 새롭게 증축했고, 2003년 3월 16일에는 그간 준비해 오던 우곡제일교회 경로대학을 설립하여 100명의 학생들이 입학하였다.
이로써 우곡면 관내의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배움의 장을 마련해 줄 수 있었다. 경로대학은 각 분야 전문가들의 강의와 특별 활동, 건강 강좌와 무료 진료, 각종 취미 활동 등의 교육 활동을 실시하고 있다. 학생들은 한 번 입학하면 종신토록 교육이 이루어지는데, 2003년 이후 현재까지 매달 첫째 목요일에 개강한다.
현재 우곡면에서는 우곡제일교회를 비롯해 객기교회, 사촌교회, 답곡교회, 포동교회 등 다섯 곳의 교회가 있다. 그 중 우곡제일교회의 교인은 약 70명 정도로 규모가 가장 크다. 도진리와 인근의 야정, 대곡, 속리, 월오 등지의 주민들이 교회를 찾는데, 그 중 도진리 주민은 대략 15명 내외다.
[20년간 교회에 봉사하다]
정규삼 목사는 청송군 현서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고등학교는 영천의 산동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구에 있는 영남신학대학을 나왔다. 이후 정규삼 목사는 1987년 7월부터 의성의 팔성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91년 1월 17일 우곡제일교회로 부임하여 도진리와 인연을 맺은 후 지금까지 몸담고 있다.
당시까지 우곡제일교회는 농촌의 소규모 교회로 교역자의 변동이 잦았고, 재정 자립도도 낮았다. 하지만 정규삼 목사가 부임해 오면서부터 교회가 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게 되었다. “목회자의 입장에서 도진리와 같은 양반 집성촌은 전교하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유교 문화의 전통이 강고하게 유지되고 있어 처음에는 어려움이 있었지요.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순수하고 협조적이어 전교에 큰 애로점은 없었습니다.”고 정규삼 목사는 회고한다.
정규삼 목사는 교회의 발전을 위해 크게 두 가지 방향에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먼저, 교회의 재정 자립을 목표로 삼아 노력한 결과 1992년부터 재정 자립을 이룰 수 있었다. 정규삼 목사는, 교회 재정은 교인들의 헌금으로 꾸려지는데 다행히 1990년대 초반부터 수박 하우스 시설 재배가 시작되면서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어 가구당 소득이 증대한 것이 재정 자립의 주요 요인이었다고 말한다. 다음으로 교회의 지역 사회에 대한 봉사에 중점을 두었다. 특히 농촌의 고령화 현상이 심화되어 노인 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2003년부터 시작한 경로대학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개설하고 있다.
이처럼 정규삼 목사가 교회의 자립과 지역 사회에 대한 봉사에 헌신한 지도 벌써 20여 년이 지났다. 그간 지역 주민들과 애환을 함께했는데, 특히 2003년 태풍 매미 때 회천 제방이 붕괴되어 농경지가 침수되었을 때가 가장 가슴 아팠다고 말한다.
이때 정규삼 목사는 주민들과 함께 수해 복구에 발 벗고 나서기도 하였다. “20년 정도 도진리에서 목회 활동을 했습니다. 이제 지역 사람들과 유대도 깊어졌고 지역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시골 농촌이어서 공기 좋고 인심도 좋지요. 사실 지금 우리의 농촌은 주민이나 교회 모두가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목회자의 사명감으로 소외된 농촌에서의 전교에 큰 보람을 느끼고 있지요. 지역 사회에서 노인들을 보살피는 일을 소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정규삼 목사는 앞으로도 지역 주민들의 평생 교육을 위한 경로대학 운영에 중점을 둘 계획이라고 한다. 우곡제일교회가 우곡면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농촌을 대표하는 복음의 중심지가 되기를 빌어 본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