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9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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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普雨 |
영어음역 | Bou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오성 |
[정의]
조선 중기 제주에 유배된 승려.
[개설]
보우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다시 세우고 도첩제도(度牒制度)를 부활시키는 등 조선시대의 억불 정책 속에서 불교를 중흥시킨 승려이다. 1565년(명종 20) 6월 25일 제주도에 유배되었으며 그 해 10월 초 유배지인 북제주군 도내봉 인근에서 입적하였다. 제주목사 변협(邊協)에게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활동사항]
보우는 15세에 금강산 마하연암(摩訶衍庵)에서 출가하였으며, 금강산 일대의 장안사(長安寺), 표훈사(表訓寺) 등지에서 수행하였다. 1548년(명종 3) 문정황후의 부름을 받고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
1550년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다시 세우고, 1551년에는 도승시(度僧試)를 실시하여 도첩제도(度牒制度)를 부활시켰다. 1552년에는 승과(僧科)를 다시 설치하게 했다. 이때 배출된 인물이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싸웠던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이다.
조선시대에는 불교의 탄압이 심하여 1471년(성종 2)에는 간경도감을 폐지했으며, 중종대에 이르러서는 도승시를 아예 없앴고, 유생들은 사찰을 방화하고 약탈하는 등의 행동을 일삼았다.
이러한 시기에 보우는 출가를 하였다. 당시 문정왕후는 신앙심이 돈독하여 각종 불교 행사를 시행하였고, 보우를 봉은사 주지로 명하여 선종과 교종을 다시 세우게 하였다. 문정왕후의 보호로 보우는 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이때부터 유생들의 표적이 되어 요승을 죽이라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565년 세자를 잃고 상심하던 문정왕후가 갑자기 죽음을 맞았다. 그러자 유생들은 문정왕후가 고기와 생선을 먹지 않고 소식을 하였기 때문에 병세가 악화되어 승하했다며 보우를 배척하고 탄압하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이 잇따르자 명종은 보우의 승직을 박탈하고, 1565년에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유배된 이후에도 전국의 유생들이 보우를 죽이라는 상소를 계속 올렸고, 그 해 10월 초에 보우가 입적하였다고 『명종실록(明宗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학문과 사상]
보우는 선교일체론(禪敎一體論)의 불교관을 갖고 있었으며, 일정설(一正說)을 주장하여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승려들의 시문을 모은 『허응당집(虛應堂集)』상하 2권, 승려들의 법어와 잡문을 모은 『나암잡저(懶庵雜著)』1권, 조선 불교의 도량 의식의 지침서 역할을 한『수월도량공화불사여환빈주몽중문답(水月道場空花佛事如幻賓主夢中問答)』1권,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염불을 권장하는 『권념요록(勸念要錄)』1권 등이 있다.
[묘소]
『불교』 제17호(1925년 11월)에 “한라산 어딘가에 작은 금불의 등 뒤에 삼성입적지지(三聖入寂之地)라 새겨져 있었다. 삼성은 보우와 환성 지안을 일컫는다.”라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불교』제6호(1924년 12월)에 실린 구산인(龜山人)의 「영주기행」에도 “보우는 목사 변협의 독수(毒手)를 만나 입적하였고, 환성 지안 스님은 유배된 후 7일 만에 어시오름 아래에서 부좌입적(趺坐入寂)하였다”고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