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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199
한자 水精寺址
영어음역 Sujeongsaji
영어의미역 Sujeongsaji Archaeological Site
분야 종교/불교
유형 유적/터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외도동 499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오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찰 터
소재지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외도동 499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외도동에 있는 고려시대 사찰 터.

[개설]

수정사는 고려시대 한라산 북쪽 지역을 대표하는 비보사찰이었다. 한라산 남쪽 지역을 대표하는 법화사와 더불어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사찰로서 조선시대에도 성쇠를 거듭했다.

[변천]

조선 전기 태종 때까지만 해도 법화사와 마찬가지로 노비 130명을 거느리고 있었던 대가람이었다. 태종 때의 배불 정책으로 노비를 30명으로 줄이면서 사세가 기울기 시작했지만 법화사보다는 지속적인 활동을 벌여왔던 것으로 보인다.

1521년(중종 16) 충암 김정「수정사 중수권문」에 원나라의 훌륭한 사찰이었다고 기록이 남아 있어 고려시대 후기에 사세가 크게 확장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수정사에 대한 기록은 1530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602년 김상헌『남사록(南槎錄)』, 1653년 이원진『탐라지(耽羅志)』, 1700년대의 「조선강역총도(朝鮮彊域摠圖)」, 1800년대 후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저본인 「동여도(東輿圖)」 등에 나타나며, 주로 조선시대의 기록인 것이 특징이다.

[위치]

수정사지가 발굴되기 이전, 이곳에는 외도초등학교의 서쪽 울타리를 따라 남쪽으로 약 200m 지점에 위치한 완만한 구릉 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수정사지에는 10여 기의 민가와 함께 수정사라는 근대 사찰이 있었고, 사찰 경내에는 옛 수정사지의 주춧돌로 여겨지는 10여 기의 석재가 방치되어 있었다.

1990년대 후반에 수정사지가 자리 잡은 외도동의 택지 개발 계획이 본격화되면서 당시 수정사의 사역을 관통하는 4차선 도로 개설 계획이 세워졌다. 그런 사업이 시행되기에 앞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문화재의 존재 여부에 따라 도로의 개설 및 우회도로 개설을 결정하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수정사지 발굴 조사에서 건물지 12동이 발견되고, 도로와 보도·탑지·석등지·담장지 등이 확인되어 수정사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유물로는 9~10세기의 해무리굽 순청자가 발굴되어 수정사의 창건 연대를 짐작하케 한다.

18세기 중엽의 백자류까지 출토되어 조선시대 후기까지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만호(万戶) 명문기와 연판문 막새가 출토되는 등 최상급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특히 수정사지에서 발굴된 청석 다층 석탑의 면석에 음각된 인왕상은 고려시대 최고의 걸작품으로 평가되어 고려시대 수정사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현황]

당시 도로 개설 사업이 강행되는 바람에 수정사지는 사라져 버렸고, 현재는 도로 주변에 수정사지 터였음을 알려주는 안내판만이 있을 뿐이다.

[의의와 평가]

수정사지는 주택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개발이라는 것이 과거의 역사뿐만 아니라 현재의 정체성마저도 잃어버리게 한다는 수정사의 경우를 통해, 역사 보존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 번 되새겨볼 일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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