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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경비 사령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952
한자 濟州道警備司令部
영어음역 Jejudo Gyeongbi Saryeongbu
영어의미역 Jeju Garrison Command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윤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군부대
설립연도/일시 1948년 10월 11일연표보기
해체연도/일시 1949년 3월연표보기

[정의]

제주 4·3 사건 당시 제주도에 설치되었던 군 부대.

[설립 목적]

제주 4·3 사건 때 군대와 경찰에 적대 조직이었던 유격대 및 그 지원 세력을 무력으로 평정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변천]

경비대 총사령부는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 경비 사령부를 설치하도록 하고 사령관에 광주 주둔 제5여단장 김상겸(金相謙) 대령을, 부사령관에는 제주 주둔 제9연대장인 송요찬(宋堯讚) 소령을 임명했다.

제주도 경비 사령관에게는 제주에 주둔 중인 제9연대와 부산에서 온 제5연대 1개 대대, 대구에서 온 제6연대 1개 대대, 여수에서 온 제14연대 1개 대대, 해군 소령 최용남이 이끄는 해군 함정, 홍순봉 제주 경찰청장이 이끄는 제주 경찰대를 통합, 지휘하는 권한이 부여됐다.

1948년 10월 19일 제5여단 예하 부대인 여수 주둔 제14연대가 제주 파병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김상겸 여단장은 8일만에 파면되고 송요찬 제9연대장이 제주도 경비 사령부를 총지휘하게 되었다. 그 뒤 제주도에 계엄령이 실시되자 계엄 사령관까지 겸임하였다.

[활동 사항]

제주도 경비 사령부 창설 6일만인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 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와 이를 위반할 시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이라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동시에 해군은 10월 18일에 함정 7척과 수병 203명을 동원해 모든 제주 해상과 해안을 즉각 차단했다. 이로써 모든 외부와의 통로가 차단되고 언론이 통제됨으로써 제주도는 고립무원의 섬이 되었다.

초토화 작전을 원활하게 전개하기 위하여 10월 후반기에 제주 읍내 유지들에 대한 일제 검속을 실시하여 수용소에 수용한 후 많은 사람들을 즉결 처분하였다. 서북 청년회는 『제주신보』를 강제로 접수하였다. 11월 초순에는 9연대 장병들 중 주로 제주도 출신 병사 100여 명을 처형하였다.

이처럼 초토화 작전을 집행하는데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철저히 제거한 상황에서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자 강경 진압의 모든 수단을 장악한 진압군은 소개된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남녀노소를 구분 없이 총살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 경비 사령부는 서북 청년회와 대동 청년단 등 민간 사설 단체들을 전위에 내세워 군경 못지않은 역할을 맡겼다. 주민들에게는 민보단(民保團)을 구성케 하여 마을 경비를 맡겼고, 민보단원 중 청년들은 다시 특공대로 편성해 진압 작전에 앞장세웠으며 학생들을 학련(學聯)으로 조직시켜 진압 작전에 활용했다.

이러한 초토화 작전으로 유격대가 빠르게 약화되어 가자 1949년 3월 제주도 지구 전투 사령부가 설치되어 제주도 경비 사령부의 업무가 이관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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